1920년 3월 20일[1] ~ 1975년 2월 28일 (향년 54세)[2]
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사회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3][4]이며 본명은 한태영(韓泰永)이다.2. 일생
1920년 3월 20일 함경남도 함흥군 덕천면 쌍봉리[5](現 함흥시 쌍봉리)의 유복한 양반가에서 지주인 아버지 한종규(韓鍾奎, 1900 ~ ?)와 어머니 경주 김씨[6]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하운의 고조부 한국보(韓國輔, 1822 ~ 1900)는 1860년( 철종 11)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한 뒤 1894년(고종 31) 사헌부 집의(執義, 종3품)에 올랐으며, 조부 한전채(韓甸埰, 1884 ~ 1925)는 대한제국 때 순릉 참봉을 지낸 바 있다. #그는 7세 때 함흥군 함흥면으로 이사하여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고, 13세에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다가 17세 되던 1936년에 한센병을 진단받았다. 하지만 학업에 계속 전념하여 이리농림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세이케이(成蹊)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22세 되던 1941년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왕징웨이 정권 치하 '북경대학'[7] 농학원 축목학계에 입학했다.[8]
대학 졸업 후 1943년에 함경남도청 축산과에서 근무한 것을 시작으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1944년 사직하고 한센병 치료에 전념하게 되었다.
1948년에 월남해서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등을 떠돌다가 1949년에 시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1949년 잡지 『신천지』에 나병의 고통과 슬픔을 노래한 「전라도 길」등 시 13편을 발표하면서 그는 죽음이 아닌 시인의 길을 가게 된다. 절망에 빠진 그를 그야말로 '신천지'로 안내한 사람은 이병철(李秉哲, 1918 ~ 1995)[9]이란 인물이었다. 이병철의 소개로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한하운은 1949년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펴내면서 더욱 문둥병 시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출처
그가 시인으로 전국에 알려지자, 같은 병을 앓던 환자들이 '구걸하지 말고 같이 모여 살자'고 제안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1949년 8월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10] 수원천 근처에 있던 한센인 정착촌 하천부락(河川部落)에 입주해 8개월간 지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 살던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 수용하기 위해 인천시 부평동에 새로운 한센병 환자 수용소를 만들고자 하는 계획으로 한하운과 교섭했다. 이에 6.25 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인 1950년 3월, 한하운은 하천부락에서 함께 거주하던 한센병 환자 가족 70여명과 함께 인천시 부평동 공동묘지 골짜기에 있던 한센인 정착촌인 성계원으로 옮겨왔고, 그곳에서 자치회장이 되었다. 관련기사 '한하운 기리는 사업 원치 않아, 조용히 살고 싶어'[11]
1952년에는 인천시 십정동 577-4번지에 한센인의 자녀들을 위한 신명보육원[12]을 창설하고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3년 8월에 한 주간신문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정체」라는 제목 하에 그의 시를 '붉은 시집'으로 규정하고 한하운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문화 빨치산'이라고 매도하면서 그가 계획하던 사업들이 일시 타격을 받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빨갱이'로 몰리며 국회에서까지 논의된 소위 '문화 빨치산 사건'은 그해 11월 '한하운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당시 이성주 내무부 치안국장의 발표가 있은 연후에야 잠잠해질 수 있었다. 기사 만월산 골짜기에 묻힌 한하운의 유토피아
1955년에는 용인군 구성면 동백리(現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일대에 동진원(東震園)을 세웠고, 1955년에는 두 번째 시집 '보리피리'를 발표했다.
1959년에 병을 완전히 털어내고 사회에 복귀한 후로도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을 위한 사회활동을 계속하였다. 1971년 12월 18일에는 당시 영부인 육영수를 수행하여 전라남도 나주군의 한센인촌을 방문하기도 했다. # 1975년 2월 28일 오전 10시 45분 경기도 인천시 북구 십정동(現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동) 산39번지 자택에서 숙환인 간경화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김포시에 묻혔다.
그의 시는 2000년대 들어 국어 교과서[13]에 수록되었다. 소록도에 있는 그의 시비(詩碑)에 더해 2017년 12월 14일에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동 186-419번지에 위치한 백운공원에도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십정동 백운공원은 그가 숨을 거둔 장소이자 살던 집인 십정동 산39번지 인근에 있다.
3. 작품
<파랑새> 한하운시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14]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 한하운시초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는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15]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16]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리리. |
<목숨> 한하운시초
쓰레기 통과 쓰레기 통과 나란히 앉아서 밤을 새운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죽어버리는 것만 같었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아직도 살아있는 목숨이 굼틀 만져진다. 배꼽아래 손을 넣으면 三十七度(삼십칠도)의 體溫(체온)이 한마리의 썩어가는 생선처럼 밍클 쥐여진다. 아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나의 목숨은 아직도 하늘에 별처럼 또렷한 것이냐. |
[1]
1919년생이라는 설이 있다.
[2]
1919년생일 경우 향년 56세.
[3]
예빈윤공파(禮賓尹公派) 25세 영(永) 항렬.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는 고려시대 예빈윤(禮賓尹)을 지낸 한연(韓連)을 파조로 하는데, 한연이
함경남도(현
강원도)
안변군으로 이주한 이래, 후손들이 대대로 안변군을 비롯한 함경남도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안변으로 칭하여
안변 한씨라고도 한다.
#
조선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도 안변 한씨로, 파조 한연의 증손 한경(韓卿)의 딸인데 한경은 한하운 시인에게는 21대조가 된다.
[4]
다만, 한하운 시인은 자신의 본관을 무엇으로 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철종 때 사람인 고조부
한국보(韓國輔, 1822 ~ 1900)와 조선 선조 때 사람인 14대조
한경상(韓敬商, 1554 ~ ?)은 각각 문과방목 및 사마방목에 본관을 청주(淸州)로 기재한 것으로 보아 한하운 시인의 직계 선조들은 일찍이 청주 한씨로 본관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5]
인근의 동흥리와 함께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
[6]
김현정(金鉉鼎)의 딸이다.
[7]
우리가 흔히 아는
북경대학은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난 후
칭화대학·난카이대학과 함께
후난성
창사시로 망명하여 국립장사임시대학(國立長沙臨時大學)을 세워 존속하였고, 이후 1938년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고
우한시까지 위험해지자 다시
윈난성의
쿤밍시로 망명하여 국립서남연합대학(國立西南聯合大學)이라는 이름으로 1946년 5월까지 존속하였다. 그래서, 한하운이 입학한 1941년 당시
왕징웨이 정권 치하의 북경대학은 중국에서
僞國立北京大學·僞北京大學·僞北大 등 이른바 '
가짜 북경대학'으로 불린다.
#
[8]
중국대외경제무역대학(中國對外經濟貿易大學)의 최옥산 교수와 일본
릿쿄대학 강사인 요시카와 나기는 한하운 시인이 자신의 연대기에 밝힌 중국 베이징 농학원과 일본 세이케이고등학교 수료 등의 학력에 왜곡되고 거짓인 부분이 있다고 지적한다.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던 한하운 시인이 해외 유학 이력을 다소 부풀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기사
[9]
한 때 중학교 국어 교과서(1946-1947)에도 시가 실렸던 시인. 경북 영양군 출생. 서울 혜화전문학교 수학. 1943년 <조광>지에 시 「낙향 소식」이란 작품으로 등단. 광복 후에는 이전의 서정적인 시와는 달리 항쟁적인 시로 변모. 1948년 전후 무렵에 이화여중에 교편을 잡았으며 1950년 봄에는 ‘남로당 서울시 문련예술과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바 있음. 이후 월북하여 북쪽의 이념에 부응하는 여러 편 시를 발표.
[10]
1988년 7월 1일
권선구에 편입되었다.
[11]
인천지역에는 지금의 부평구 십정동과 청천동, 남동구 간석동 등에 대표적인 나환자 치료시설과 격리시설이 설치됐다. 이곳에서 살게 된 나환자들은 국고 구호품외에도 국유지를 불하받아 황무지를 개간해 양돈과 양계농장을 만들어냈다. 부평농장, 청천농장, 십정농장이 당시 나환자들이 개간해 일군 농장이었다. 이 중 십정농장은 지난 1998년 신동아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당시 거주했던 나환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체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부평농장(130여명)과 청천농장(60여명)은 농장자치회를 만들었고 아직도 70~80대 노인 나환자들이 생존해 명맥을 잇고 있다. 이들 농장은 2006년 현재 축사를 개조해 소규모 영세 제조업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12]
당시는 허울만 좋은 `복지시설'이었지, 사실은 나환자인 부모와 나병에 걸리지 않은 자녀들을 격리해 수용하는 시설이었다.
[13]
7차 교육과정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서는 한하운의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도 수록되었다.
[14]
여기서 '예다'는 '가다'라는 뜻이다. 옛 어형 '녀다'에서 유래한다.
[15]
일본식 버선
[16]
저자거리와 같이 북적거리는 사람 사는 세간(世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