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한명식(韓明植) |
생몰 | 1917년 2월 13일 ~ 1963년 7월 10일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 향산리 |
사망지 | 충청남도 아산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한명식은 1917년 2월 13일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 향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1년 홍성공립보통학교 고등과를 중퇴하고 1934년 아산에 있는 신창공립농업실습학교에 몇 개월 다니다가 역시 중퇴했다. 그 후 그는 이선준(李銑濬)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했다. 그는 주위의 친구들을 독립운동에 참여시키기 위해 반일적인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만주에 사는 친구 배기동(裵奇童)에게 ‘조선을 독립시킬 용사가 되어 달라’는 취지의 편지를 발송했고, 여름에는 충남 예산농업학교 학생 김한태(金漢台)에게, ‘조선을 재건함은 우리들 청년의 책임이니 조선과 동포를 위해 노력하라’는 취지의 편지를 보냈다.1934년 10월에는 예산농업학교 학생 신상철(申相澈)에게 ‘내선융화라든가 자력갱생 농촌진흥 등을 고창하는 반면 탄압정치는 매일 매일 신성한 조선을 일본 놈들에게 빼앗기고 가만히 있을 것인가. 크게 분기하여 조선독립의 용사가 되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며, 같은 달에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정헌갑(鄭憲甲)에게, ‘나날이 피폐해 가는 조선과 기아에 우는 동포를 위하여 우리들의 손으로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자’라는 취지의 편지를 발송했다. 또한 11월중에는 아산에 거주하는 조재선(趙載善)에게, ‘자력갱생 농촌진흥운동은 전부 가면정책에 불과하다. 이 감언에 속지 말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크게 분기 하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1934년 12월, 한명식은 천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엽서 연하장 2매를 제작했다. 한 장에는 위쪽에 ‘충남 아산군 경산리’라고 쓰고, 중앙에는 ‘한명식군’, 좌측 하단에는 ‘동경궁성(東京宮城) 히로히토(裕仁) 배(拜)’라고 썼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장에는 좌측에 ‘충남 아산군 도고면 경산리’ 중앙 상단에는 ‘한명식 각하’ 좌측 하단에는 ‘동경궁성 히로히토 천황 배’라고 하였다. 즉, 일본 궁궐에 사는 히로히토라는 평범한 사람이 한명식이라는 왕에게 절하면서 새해를 축원하는 연하장을 만든 것이다.
이 일이 발각되면서 1935년 2월 홍성경찰서에 체포된 그는 1935년 9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불경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36년 9월 1일 가출옥했다. 이후 아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3년 7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한명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