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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10 13:36:18

한노(제1차 포에니 전쟁)

1. 개요2. 메사나 수비대 지휘관 한노3. 한니발의 아들 한노4. 올비아의 한노5. 아이가테스 해전의 한노

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 고대 카르타고 장군으로서 로마군에 맞서 싸운 인물들.

2. 메사나 수비대 지휘관 한노

기원전 265년, 시라쿠사 참주 히에로 2세의 맹공으로 위기에 직면한 라틴인 용병 마메르티니(Mamertini)는 마메르티니 지도부는 카르타고에 구원을 요청했고,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즉시 출격해 시라쿠사군을 물리치고 도시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러나 마메르티니의 상당수 인사들은 카르타고가 메사나를 완전히 지배하려 들 거라 여기고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다.

많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마메르타니가 일전에 자신들을 잘 대해줬던 메사나 주민들을 학살하고 그 도시를 장악한 뒤 20여 년간 시라쿠사 각지를 노략질하는 등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남부의 패권을 쥐기 위한 긴 전쟁을 이제 막 완료하고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데 시칠리아에 군대를 보내서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를 상대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겼기에 이 요청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부 지중해 최강국인 카르타고가 이탈리아 본토 코앞인 메사나를 장악한다면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원로원 내에서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메사나에 군대를 파견하는 안건은 민회에 회부되었다. 당해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는 이 기회에 군공을 세워서 아욱토리타스(Auctoritas)[1]를 쌓고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평민들에게 풍부한 전리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평민들은 이에 감화되어 마메르티니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264년, 카우덱스는 2개 군단을 이끌고 메시나 맞은편 해안 도시인 레지아에 이르렀다. 그는 먼저 사촌이며 대대장을 맡고 있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소규모 분견대를 맡기고 바다를 건너게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바다를 성공적으로 건넌 뒤 마메르티니가 내부에서 호응한 덕분에 메사나를 장악했고, 한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도주했다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3. 한니발의 아들 한노

기원전 264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이끄는 로마군 분견대가 카르타고 해군의 저지를 뚫고 메사나에 입성하자, 카르타고 정부는 폴리비오스가 "한니발의 아들"이라고 지칭한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을 파견했다. 한노는 히에로 2세가 이끄는 시라쿠사군과 연합한 뒤 메사나를 포위했으며, 함대를 메사나와 레지아 사이의 바다에 배치해 로마군이 메사나에 추가로 오는 것을 막았다.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텍스는 협상을 제안했지만 무조건 철수하라는 답변만 받을 뿐 별다른 성과가 없자, 야밤에 적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전 군대를 수송선에 싣고 바다를 건넜다.

해가 뜰 무렵 상륙을 완료한 로마군은 즉시 시라쿠사 진영을 공격했다. 시라쿠사군은 평원으로 나와서 회전을 벌였다가 보병대가 격파당하자 진영으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적 진영을 공략하려 했지만 적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쉽사리 이루지 못했고, 그 사이 시라쿠사 기병대가 로마 기병대를 격파하고 후방을 위협하자 철수했다. 그 후 히에로 2세는 로마군이 바다를 완전히 건넌 것에 낙담한 데다 시라쿠사 내부에서 변란이 일어날 조짐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시라쿠사로 철수했다. 다음날, 카우덱스는 카르타고군을 공격해 손쉽게 물리치고 메사나 포위를 풀었다. 그 후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군사적으로 압박했고, 히에로 2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기원전 263년 로마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262년, 한노는 아그리젠툼을 포위한 로마군을 격퇴하기 위해 출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노가 이끌고 온 군대에는 50마리의 코끼리, 누미디아 기병, 리구리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용병대가 있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보병 50,000명, 기병 6,000명, 코끼리 60마리였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보병 30,000명, 기병 1,500명, 코끼리 30마리였다고 한다. 한노는 먼저 아그리젠툼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진출한 뒤 로마의 공급 기지인 헤르베소스를 점령하고 로마군 보급물자들을 모조리 탈취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 장병들이 굶주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전염병이 창궐했다.

한노는 적이 조속히 전투를 벌이고 싶어할 거라 예상하고 누미디아 기병에게 적 진영에 접근해 도발하라고 지시했다. 로마 기병이 진영 밖으로 뛰쳐나오자, 누미디아 기병들은 일부러 그들 앞에서 퇴각했다. 로마 기병들이 그들을 뛰쫓다가 카르타고 진영 가까이에 이르자, 누미디아 기병들이 돌아서서 로마 기병들을 공격했고 다른 카르타고군도 가세했다. 로마 기병들은 이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고 숙영지로 패주했다. 이 승리에 고무된 한노는 아그리젠툼의 로마 진영에서 1.5마일 떨어진 토로스 언덕에 새 숙영지를 세우고 로마군을 압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아가 창궐하고 탈영병이 속출하자, 두 집정관은 이대로 가다간 끝장이라고 여기고 평원에 전투 대형을 갖추고 적에게 회전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한노는 이대로 끌고 가면 로마군이 알아서 무너질 거라 여겼기에 거부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두 군대는 2달 동안 서로 가까이 있었고 투창을 몇 차례 교환한 것 외에는 별다른 교전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아그리젠툼 수비대 지휘관 한니발 기스코는 성내의 식량 부족이 심각해져 수비대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속히 구원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봉화를 올렸다. 한노는 이걸 보고 그제야 회전을 벌이기로 했고, 로마군 역시 기꺼이 응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아그리젠툼 전투에서,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패배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보병 3,000명과 기병 200명이 전사하고 포로는 4,000명이었으며, 코끼리 8마리가 죽고 33마리가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한편 로마군의 손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폴리비오스는 패주하는 적을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한니발 기스코는 아군이 패배하자 전투 다음날 밤 용병들과 함께 도랑을 짚으로 채워 넣은 뒤 아그리젠툼에서 도주했다.[2] 다음날 아침 적이 빠져나온 것을 알게 된 로마군은 한니발 기스코를 추격했지만 뒤쳐진 적병 몇 명을 사살하거나 붙잡았을 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아그리젠툼으로 돌아와 이렇다할 저항 없이 도시를 점령하고 심각한 약탈을 자행한 뒤 주민 25,000명을 노예로 팔았다.

기원전 256년, 한노는 하밀카르와 함께 카르타고의 본토인 아프리카로 쳐들어오는 로마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두 장군은 즉시 에크노무스에서 5마일 떨어진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함대를 집결시켰는데, 그 수가 350척에 달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 함대에 14만 명의 선원, 노 젓는 사람, 군단병이 있었으며 카르타고 함대에 15만 명이 탑승했다고 밝혔다. 현대 학자들은 이를 과장이라고 간주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해전인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이후 에크노무스 곶 앞바다에서 330척의 로마 함대와 마주치면서, 에크노무스 해전이 발발했다.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 해군이 패배하면서, 로마군은 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후 한노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데, 딱히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는 없는 것을 볼 때 아마도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올비아의 한노

기원전 259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코르시카에 상륙한 뒤 알레리아 시를 습격하고 파괴한 뒤 섬 전체르 어려움 없이 점거했다. 뒤이어 사르데니아로 건너가 올비아를 포위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올비아를 공략하는 동안 카르타고 사령관 한노가 전사하자 그를 명예롭게 묻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사료를 제공했고 스키피오 가문에 매우 호의적이었던 폴리비오스가 정작 기원전 259년 집정관 스키피오의 활약상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은 점, 이 때 공략되었다는 올비아가 이후에도 카르타고의 나와 있는 점을 볼 때, 스키피오가 강력한 적 함대의 등장에 포위를 풀고 이탈리아로 철수했다는 요안니스 조나라스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5. 아이가테스 해전의 한노

기원전 242년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가 이끄는 로마 함대 220척이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 세력의 최후 거점인 릴리바이움 해상을 봉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카르타고 정부는 한노에게 250척의 전선과 150 ~ 350척의 수송선을 맡겨 해상 봉쇄를 뚫고 보급품을 릴리바이움 수비대에 전달하게 했다. 한노는 아이가테스 제도의 서쪽에 있는 히에라 섬에 집결한 뒤, 바람이 유리한 쪽으로 불 때 릴리바이움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로마 해군이 저지하기 전에 도착하여 수비대에게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카르타고 함대가 기원전 241년 3월 초에 히에라에 도착하자마자 로마 척후선이 이를 확인한 뒤 카툴루스에게 보고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봉쇄를 풀고 200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시칠리아에서 16km 떨어진 에구사 섬에 정박했다

기원전 241년 3월 10일 아침, 서풍이 강하게 불기 시작하고 해류도 같은 방향으로 흐르자, 한노는 즉시 릴리바이움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적을 저지하기로 하고, 로마 선박에서 돛대, 돛 및 기타 불필요한 장비를 제거해 거친 풍랑에서 배를 제대로 조율할 수 있게 했다. 다만 카툴루스 본인은 이전 교전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고, 부관 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가 그를 대신해 전투에 임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참패한 한노는 카르타고로 도주했지만 패전을 초래한 책임을 지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1] 한 사람이 지닌 사회적 명예와 능력, 영적인 힘 등을 종합한 개념. 이것을 많이 쌓은 자들은 신들의 총애를 입어 가문 대대로 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겨졌기에 로마 정치인 및 장군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2]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한노는 사전에 한니발 기스코에게 자신이 로마군과 전투를 벌일 때 후방에서 로마군을 치도록 했다. 하지만 이것을 간파한 로마군은 매복병을 사전에 배치했다가 한노가 쳐들어왔을 때 전방과 후방에서 요격해 대파한 뒤 한니발 기스코 역시 격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차검증이 되지 않기에 신빙성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