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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11:35:38

하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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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e5e5e5> 하치
ハチ
파일:하치코.jpg
말년의 하치코
이름 <colbgcolor=#ffffff,#191919>하치
충견 하치공
출생 1923년 11월 10일
아키타현 키타아키타군 니이다무라
(現 아키타현 오다테시)
사망 1935년 3월 8일 (11살)
도쿄부 도쿄시 시부야구
(現 도쿄도)
견종 아키타견
견주 우에노 히데사부로
1. 개요2. 생애3. 죽음과 기념4. 대중 매체5. 기타

[clearfix]

1. 개요

하치(ハチ) 또는 하치코(ハチ公, 하치공)는 '기르던 주인이 죽은 뒤에도 역 앞에서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일화로 유명해진 일본의 개다. 품종은 순종 아키타견으로,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 '충견 하치공(忠犬ハチ公)'[1]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널리 사랑받았다.

2. 생애

1923년(다이쇼 12년) 아키타현 오다테시에서 태어났는데 원래는 사이토 요시카즈라는 사람의 집에서 태어난 강아지였으나 사이토가 평소에 신세를 많이 진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교수인 우에노 히데사부로(上野 英三郎, 1872~1925)[2]에게 강아지 두 마리를 보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하치였다.

우에노는 아키타견을 좋아해 여러 번 길렀지만 번번이 죽어 상심하던 차에 얻은 몸이 약한 하치를 극진히 돌보았다. 우에노의 노력에 하치는 건강해졌고, 다 자란 뒤에는 매일 문 앞까지 주인을 배웅해, 시부야역[3]까지 따라가거나 마중을 나왔다. 하치 외에 포인터 종류의 존과 S라는 이름의 개도 하치와 함께 주인을 마중 나왔다.

그러나 우에노는 1925년 5월, 교수 회의를 마치고 다른 교수와 이야기를 하다 급성 뇌출혈로 뒤로 쓰러져 돌연사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치는 농학부 정문 앞에서 주인을 기다렸지만, 주인이 나오지 않자 집으로 돌아가 3일 동안 헛간에서 식음을 전폐했다.

이후 우에노의 부인에 의해 부인의 팔촌 친척에게 맡겨졌지만 문제가 있어 다시 시부야로 돌아왔고, 이후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늘 시부야역에 죽은 주인을 마중 나왔다.[4] 그러나 떠돌이 개인 줄 알고 개장수가 잡아가거나 장사에 방해된다고 상인들이 하치를 구박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던 중 '일본 개 보존 협회'를 조직한 사이토 히로시가 상인들에게서 구박받는 하치를 목격하고 불쌍히 여겨 아사히 신문에 하치의 사연을 기고한 것이 세간에 알려져 유명해졌다. 하치의 한쪽 귀가 늘어진 것 때문에 잡종이냐는 논란도 일었지만 공식적인 설명은 잡종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피부병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2022년 4월에 방영한 한 일본 예능 프로그램에 하치코를 실제로 보고 만져본 적도 있는 90대 노인이 출연했다. 그가 증언하기로는 하치코가 다른 개와 싸우다 귀가 찢어졌고, 그걸 사람이 꿰매줬지만 수의사 같은 전문인이 아닌 일반인이 꿰맸기에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해 늘어졌다고 주장했다. 단, 본인도 우연히 행인에게서 들었다고 했으니 정확한 사유는 아닐 수 있다.

3. 죽음과 기념

파일:Hachiko-Statue.jpg
시부야역의 충견 하치코 동상.
해당 동상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JR 시부야역 출구 명칭은 \하치코 출구(ハチ公口)이다.

하치의 일화는 도쿄는 물론 일본 전국에서 유명해졌으며, 사연을 듣고 감동한 조각가 안도 데루가 하치의 조각상을 만들고 싶다고 사이토 히로시에게 제안하여, 그의 동상이 제작되었다.[5] 하치코 동상의 제막식에는 하치 자신도 참석했다. 하치는 이후에도 계속 떠난 주인을 마중하는 걸 멈추지 않다가, 1935년 3월 8일 개에게 치명적인 필라리아가 원인이 되어 11세로 생을 마감했다.[6] 떠돌이 개였으므로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충견 하치코 이야기는 전 일본인들의 심금을 울렸고 생전 하치코의 조각상은 쇼와 덴노에게까지 바쳐졌다. 그러나 정작 당시 만들어졌던 하치코 동상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물자 징발 탓에 금속 공출로 헐려 녹는 수모를 겪었다. 전후인 1948년에 다시 동상이 세워졌으며, 이 동상은 지금도 시부야역 광장 중앙에 있는데, 시부야역이 확장 개보수를 하면서 위치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오늘날 시부야역의 하치코 동상 주변은 '만남의 장소'의 대명사가 되는 등, 시부야 일대의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되어 있다.
파일:하치코 박제.jpg
일본 국립 과학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하치의 박제.[7]

한편, 하치의 사체는 부검 후 박제되어 도쿄도 다이토구 소재 국립 과학 박물관(国立科学博物館)에 기증되었으며, 순종 아키타견이라는 특징을 사서 상설전이 열리는 일본관 2층에 아키타견의 표본으로 전시되고 있다. 또 그의 장기 표본은 도쿄대학 농학부에 기증되었으며, 농학 자료관에서 보관, 전시하고 있다.

4. 대중 매체

5. 기타



[1] 이름이 하치코가 아니라, 하치공(ハチ公)의 일본어 발음이다. 본래 우에노의 제자인 농학부 학생들이 부른 별명으로, 자신의 교수 우에노를 기다리는 하치를 함부로 부르는 것은 좀 그렇다는 생각에 공(公)을 붙여 지칭했다. [2] 출처에 따라 일본 내에서도 '우에노 히데자부로' 또는 '우에노 에이자부로'로 읽는 경우도 있다. 1895년에 제국대학 농과 대학을 졸업하고 식량 증대 필요성에 의한 새로운 농업 형태의 이념 및 기술을 학문으로 완성함과 아울러, 기술자 양성에도 주력하여 일본에서 '농업 토목학의 거부'로 꼽힌다. 경지 정리법도 그가 고안해 내었다. 또한 교육자로서만이 아니고 농상무성 관련 사업의 기술자로서도 명성을 얻어 하천 개수, 치수 사업, 식량 증산 계획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경지 정리법이 시행됨과 동시에 경지 정리 기술자를 다수 양성하면서 대학 교육만이 아닌 경지 정리 사업의 현장에서 기술 지도를 위해 경지 정리 강좌·농업 공학 교과서와 같은 교과서도 다수 저술하였다. 그리고 그의 손자인 우에노 가즈토는 할아버지의 고향인 미에현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미에현 의회 의장을 지냈다. [3] 도쿄를 대표하는 도심과 상권 중 한 곳이지만, 당시에는 개발조차 되지 않은 깡촌이었다. 당시 도쿄대학 농학부는 현재의 고마바 캠퍼스에 위치했고, 우에노 히데사부로의 집은 고마바 캠퍼스와 시부야역의 중간 지점 정도에 있었다. 이에 우에노의 출퇴근은 도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마바 캠퍼스에서 시부야역까지는 도보로 대략 30분이다. 당시에는 고마바토다이마에역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시부야역에서 전차로 출퇴근했다는 것은 더욱 생각하기 어렵다. 실제 시부야역은 우에노가 장기간 출장을 갔다 돌아올 때 이용했으며, 하치코가 그것을 알고 마중 나간 적은 있다고 한다. [4] 하치코에 대하여 회의적인 사람들은 사실 죽은 주인을 마중 나온 게 아니라 역 주변에 먹을 것이 많기 때문에 나온 것을 사람들이 오해하고 떠받들자 역에 나오는 행동이 더 강화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5] 한창 작업을 하던 중 하치를 맡았다고 자칭한 노인 고바야시 사부로가 하치코 동상을 세우기 위해 그림 엽서를 팔아 그보다 앞서 동상을 세웠다고 했다. [6] 개의 나이 11세는 사람 나이로 따지면 대략 65세에 해당하여, 죽을 당시에도 이미 노견이었다. [7] 박제 과정에서 상술한 잡종 논란을 의식해 처진 왼쪽 귀를 바로 세워 놓았다고 한다. [8] 한국에서는 2002년에 개봉하였다. [9] 마지막 엔딩에서는 하치는 자신을 계속 돌봐주던 주변 사람들까지 떠나거나 사망하고 완전히 혼자가 된다. 숨을 거두기 직전 기차역에서 마지막 울음소리를 내면서 우에노 교수와 재회하는 환상을 보고 눈밭에서 쓸쓸히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치의 시신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모습을 보이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실제 하치는 암에 걸린 상태였고 주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다가 기차역 반대편에서 무지개다리를 건넌 채 발견되었고 모두의 슬픔 아래 장례식이 치러진 다음 그토록 그리워했던 우에노 교수 옆에 묻혔다. [10] 초반에 일본 아키타현이 잠깐 나온다. [11] 하치코를 한자 차음 한 것이다. 중국 발음으로는 '바궁'이라고 불린다. [12] 다만 이때 가게가 해적들에게 방화되는 일이 생기나 나중에 다시 지어진다. [13] 유대를 달성하면 이름을 지을 수 있는데 선택지에 하치가 있다. [14] 하치코로 달려 나와 우리의 신을 만나자. [15] ' 하치오지('八'王子) 다카사키('高'崎)를 잇는 노선이라는 뜻이다. [16] 한화 약 3만 8,225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