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피에르 드 빌렌 Pierre de Villain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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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30년 ~ 1406년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보스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파리 | |
직위 | 국왕의 시종, 왕실 평의회 의장, 라로셸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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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5세, 샤를 6세 치세에 활동한 프랑스 시종관. 샤를 5세와 샤를 6세의 심복이었으나, 샤를 6세가 광기에 걸린 후 왕의 삼촌들에 의해 축출되었다.2. 생애
1330년경 프랑스 중북부의 센 강과 루아르 강이 교차하는 지점인 보스에서 출생했으며, 파리 분지와 보베 사이의 국경 지역에 살던 프랑스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 1356년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지시에 따라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소유한 에브뢰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357년 바이외 수비대장이 되었다. 1360년 도팽 샤를의 시종이 되었고, 같은 해 잉글랜드 용병대장 토머스 바고른으로부터 라 페르테수주아르 요새를 구입했고, 모의 대장으로 활동했다. 1360년부터 1362년까지 툴루즈와 카르카손의 세네샬을 역임했고, 1361년 클레르몽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했다.1364년 코르슈렐 전투에 참전해 승리에 기여했고, 같은 해 9월 29일 오레 전투에 참전했다가 일시적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365년 왕위에 오른 샤를 5세의 지시에 따라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 이후 해체되었던 용병대를 재편성한 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위를 놓고 페드로와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던 엔리케 2세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카스턍의 백색 중대를 지휘해 페드로를 축출하는 데 기여했다. 1367년 4월 3일 페드로를 복위하기 위해 카스티야로 진군한 흑태자 에드워드에 맞서 나헤라 전투에 참전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생포된 뒤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1369년 후 게클랭과 함께 엔리케 2세를 재차 카스티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로 재진입했고, 그해 3월 14일 몬티엘 전투에서 300명의 중대를 지휘해 페드로를 결정적으로 꺾는 데 기여했다. 1369년 12월 20일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 엔리케 2세로부터 리바데오 백작에 선임된 뒤, 이 땅을 카스티야 무관장 루이즈 로페즈 다발로스에게 팔았다. 1373년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휘하에 들어가 랑그독을 다스리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377년 9월 1일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가담해 에메 공략에 기여했다.
1380년 새로운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시종이 되었으며, 1381년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후안 1세의 전쟁에 참여했다. 또한 1382년 11월 27일 루즈베케 전투에도 참여했으며, 1383년 말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고자 이베리아 반도로 가서 카스티야 측에 섰다. 1388년 친정을 선포한 샤를 6세의 주요 고문을 맡았으며, 1390년 라로셸 총독을 맡았다. 1390년 말과 1391년 상반기에 카스티야에 2차례 방문해 외교 임무를 수행했으며, 1391년 9월 국왕 특사로서 잉글랜드에 방문해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와 전쟁을 종식하는 문제를 놓고 협상했다.
1392년 샤를 6세가 광기에 빠진 후, 왕의 삼촌들이 권세를 잡은 후 샤를 6세의 측근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두었다. 이때 그도 루브르 감옥에 갇혔다가 6개월 후 회복된 샤를 6세의 명령으로 풀려날 수 있었지만, 카스티야로 망명했다. 1394년 프랑스 왕실의 총애를 다시 얻고 왕실 참의원으로서 활동을 재개했다. 1397년 샤를 6세의 세번째 아들인 루이 드 기옌의 대부를 맡았으며,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과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401년 이브토 공이 되었으며, 1403년 생 코스메 드 루자르슈 대성당에 기부했다. 1406년 파리에서 사망할 때까지 왕실 고문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