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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5 21:04:40

프랜시스 올덤 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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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올덤 켈시
Frances Oldham Kelsey
파일:Frances_Oldham_Kelsey.png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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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4년 7월 24일
사망 2015년 8월 7일 (향년 101세)
성별 여성
학력 세인트 마가렛 스쿨 (졸업)
빅토리아 대학교 (약리학)
맥길 대학교 (약리학/학사·석사)
시카고 대학교 (약리학/박사)
경력 미국 의학 협회(AMA) 저널 편집 부장
사우스다코타 대학교 의과대학 일반의
미국 식품의약국 의약 검열관
미국 식품의약국 과학 조사관
수상 미국 대통령 우수 연방 민간 공무원 공로 훈장(President's Award for Distinguished Federal Civilian Service) (1962년)
시카고 대학교 Gold key Award (1963년)
전미 여성 명예의 전당(National Women’s Hall of Fame)(2000년)
Foremother Award (2006년)
켈시 상[1](2010년)
캐나다 국민훈장 2등급 (2015년)
1. 개요2. 생애
2.1. FDA 활동2.2. 미국인의 존경을 받게 되다2.3. 말년
3. 평가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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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식품의약국에 근무한 연방공무원으로 탈리도마이드 사건에서 보여준 행적 때문에 유명하다. 지금까지 미국내에서 거대 기업과 이권에 맞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무원으로 회자된다.

2. 생애

1914년 7월 24일 브리티시 콜롬비아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15세에 세인트 마가렛 스쿨을 졸업하고 빅토리아 대학교에 입학했을 정도로 수재였다. 1934년에서 1935년 1년간 맥길 대학교에서 학사·석사 과정을 마치고 한 교수의 제안에 따라 시카고 대학교 에서 박사 과정을 밟게 된 그녀는 당시 유명했던 유진 게일링(Eugene M. K. Geiling )교수의 연구진에 부조교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켈시가 후일 푼 재밌는 이 하나 있다. 게일링 교수의 연구진에 합류하고 싶었던 켈시는 게일링 교수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때 일부로 자신의 이름 Frances에서 e를 i로 바꿨다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여성이라고 요청이 거부당할까봐 우려한 켈시가 영미권의 흔한 여자 이름인 Frances를 Francis로 바꿔 최대한 남자처럼 보이게 꾸민 것이다. 이에 게일링 교수는 켈시를 남자로 알고 자신의 연구팀에 부조교라는 직책으로 합류시켜준다.그뒤 1937년 켈시와 연구팀은 FDA와 협력하여 당시 특효약이던 '술파닐아미드'라는 약의 부작용과 그 원인을 조사해 '술파닐아미드'의 독성 물질 디에틸렌 글리콜(diethylene glycol)이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까지 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켈시와 연구팀의 연구를 계기로 미국 내에선 연방 식품, 의약품 및 화장품 법이 제정되었다.

2.1. FDA 활동

결혼 후 사우스다코타 대학교에서 일반의로 활동하다 1960년 8월, 그녀는 FDA의 신임 의약품 검열관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첫번째 임무로 당시 서방 세계에서 유행하던 탈리도마이드라는 진정제의 적합성을 검사하게 된다. 근데 켈시는 제약회사들의 예상을 뒤집고 탈리도마이드의 승인 요청을 거부한다. 사유는 서류미비,자체 실험 자료 미비,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 검토 불충분.[2]특히 그녀는 이 약의 부작용으로 말초신경염, 팔과 발에서 통증이 보고되는 것을 주목하며 더 많은 정보와 안정성에 대한 추가 증거를 요구하며 1년 이상 승인을 거부했다 이에 탈리도마이드의 제조회사인 그뤼넨탈(Grünenthal GmbH)은 켈시의 상사에게 전화를 거는 등 온갖 수를 써가며 켈시를 압박했다.[3]그러나 켈시는 이러한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2.2. 미국인의 존경을 받게 되다

파일:talomaid.jpg
1961년 8월 유럽에서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 출산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과 발표된 것. 이후 이 약은 회수되기 시작했지만 이미 탈리도마이드 때문에 전세계에 1만 2천 명 이상의 기형아가 출산됬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콘테르간 스캔들(Contergan-Skandal)'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된다. 한편 미국은 켈시가 이 약품의 승인을 거부한 덕분에 피해자를 17명으로 최소화 시킬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켈시는 미국의 영웅으로 떠오르며 공무원 최고 영예의 상인 '미국 대통령 우수 연방 민간 공무원 공로 훈장(President's Award for Distinguished Federal Civilian Service)'을 미국 여성 2번 째로 수상하게 된다.

2.3. 말년

탈리도마이드사건으로 미국의 의약품 허가 제도는 한층 강화되며 켈시는 현대적인 의약품 규제 법률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사건 이후로도 90살까지 FDA에서 계속 근무하다 2005년 은퇴했다. 그후 조용히 살다가 FDA로 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인 '켈시 어워드'를 받는 등 공무원으로써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2015년 7월 1일 캐나다에서 국민 훈장 2등 급을 받은 후 한달 뒤인 2015년 8월 7일에 사망했다. 향년 101세

3. 평가

4. 참고 문헌



[1] 자기 이름을 딴 상이다 [2] 출처: # [3]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