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19 23:31:29

프랑스 갈


<colbgcolor=#000><colcolor=#fff> 프랑스 갈
France Gall
파일:프랑스 갈.jpg
본명 이자벨르 쥬느비에브 마리 안느 갈
Isabelle Geneviève Marie Anne Gall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4공화국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출생 1947년 10월 9일
프랑스 제4공화국 파리
사망 2018년 1월 7일 (향년 70세)
프랑스 뇌이쉬르센
직업 가수
장르 제제, 샹송, 신스팝
활동 기간 1963년 ~ 1997년
1. 개요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가수. 1965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룩셈부르크 대표로 참가하여 "Poupée de cire, poupée de son"이라는 곡으로 우승한 것을 계기로 스타덤에 올랐으며, 1980년대에도 활발히 활동하다가 1990년대에는 가수이자 남편이었던 미셸 베르제의 죽음과 첫 째 딸 폴린이 죽은 이후로는 거의 활동이 없었다. 2018년 1월 7일 암 투병과 관련된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프랑스 갈은 60년대 프랑스 팝을 선도했던 이른바 예예(ye-ye) 가요를 주로 취입하는 아이돌로 프랑스 연예계에서 확고부동한 입지를 다졌는데, 그 기반은 공히 1965년에 룩셈부르크 대표로 참가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근거할 것이다. 사실 프랑스 갈은 룩셈부르크 출신이 아니라 프랑스 태생인데, 가수의 국적을 엄격하게 규정하지 않는 유로비전의 정관도 그렇거니와 모나코나 룩셈부르크, 벨기에 등이 같은 프랑스어권 언어를 공유하는 타국의 가수들을 빈번히 기용했던 점에서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갈은 RTL 예심에서 룩셈부르크 대표로 선출되어 이듬해 1965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출전 티켓을 거머쥔다. 참가곡은 그 유명한 세르주 갱스부르가 작곡하였는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모티프를 따왔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가 밝힌 것은 없다. 특히 그가 작곡한 가요들과 같이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가사의 궤를 함께 하는데, 갱스부르에 따르면 과거 노래가 내장된 밀랍 인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의 가사가 함의하는 상징적 의미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진행되어온 바 음악계나 대중이 그가 밝힌 대로 가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녹음된 노래만 부르는 예쁘장한 밀랍 인형을 주제로 풀어내는 가사는 단연 프랑스 갈에 대한 우회적인 비방을 엿보게 했는데, 이 노래가 대상을 거머쥐고 일약 히트곡의 반열에 오르면서 그러한 구설도 퍼져나갔다. 반면 프랑스 갈은 이후 소회를 풀어내기를 오히려 그런 식으로 여성 가수를 취급하는 야만적인 음악계에서 자신의 처지와 잘 맞닿아있어 공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물론 갱스부르와 갈이 유로비전 작업을 하면서 표면적으로 불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갱스부르 특유의 대중적이지 않은 멜로디와 극적인 전개 역시 이 곡에 담겨져 있는데, 당시 출품된 다른 참가곡들과 비교해봐도 그당시의 관점에서 꽤나 진보적이며 전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캐스터네츠가 담긴 스페인 풍의 빠른 템포와 단조 구성이 묘한 긴장감을 유발하면서 청중으로 하여금 노래에 몰입하게 하는 효과를 은연중에 일으켜 크게 호평을 받았다. 갱스부르의 이러한 실험적 작곡은 이후 유로비전 출품곡에도 등장하는데, 가령 1967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는 모나코의 참가곡을 작곡해줬는데 이쪽은 지금 들어도 너무 전위적인데다 도무지 맥락을 이해할 수 없는 가사라서 물론 당시에도 우승을 거머쥐지는 못하였다.

파일:France-Gall-Italie-1965-Eurovision.jpg
1965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대회 직후 점수판에서 자신의 점수를 가리키는 프랑스 갈.

유로비전에서 이 곡으로 우승하고 갈은 유럽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로 건너가 프랑스를 오가며 TV쇼 출연과 인터뷰 등 어마어마한 스케줄을 소화했다. 그 해 스페인과 노르웨이 가요차트 1위를 이 곡이 차지했고, 프랑스와 룩셈부르크, 독일 차트에서는 종합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활발한 음악 활동을 전개하며 60년대 프랑스의 대표적 예예 가수로 발돋움한다. 갈의 소녀적인 유럽 백인 여성 프랑스어 화자 이미지는 당시 프랑스 광풍이 불던 일본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갈은 이에 호응하여 여러 차례 일본에서 콘서트를 가지기도 하였다.

대표곡으로는 ‘Polichinelle’, ‘Sacré Charlemagne’, ‘Ella elle l’a’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