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신창 표씨[1] |
출생 | 1884년 4월 26일[2] |
충청도
정산현 읍면 대박리 (現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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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8년 11월 21일[3] (향년 64세) |
충청남도 청양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593호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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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표영봉은 첫째 남동생이다.
2. 생애
1884년 4월 26일 충청도 정산현 읍면 대박리(現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에서 아버지 표현만(表顯萬, 1853. 3. 12 ~ ?. 9. 24)[4]과 어머니 경주 최씨(1859. 9. 8 ~ 1930. 8. 26)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큰아버지 표현수(表顯壽, 1850. 4. 10 ~ ?. 12. 4)[5]에 입양되었다.1919년 4월 5일 오후 3시 청양군 정산면 정산시장에서 정산향교 직원으로 있던 권흥규(權興圭)가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에 첫째 남동생 표영봉을 비롯한 1백여 명의 정산면민들과 함께 참여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행진했다. 그 뒤 일본군 헌병대가 출동해 시위 참여자 30여 명을 강제로 연행해 가자, 이에 분노해 군중들과 함께 구금된 시위 참여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달려갔는데, 이때 시위 주도자 권흥규가 일본군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다가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했다.
4월 6일 아침에 정산시장 사람들이 권흥규의 유해를 청양군 목면 안심리 자택으로 운구하자,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운구행렬에 동참해 재차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공주군(現 공주시)에서 지원을 나온 일본군 헌병대에서 무차별 사격을 감행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곧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4일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청양군 헌병분견소에서 태형 90대를 선고받아 현장에서 처벌받은 뒤에야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48년 11월 21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별세했다.
2004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2007년 10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