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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섀퍼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파울 섀퍼
Paul Schäfer
파일:파울 섀퍼.png
본명 파울 섀퍼 슈나이더
Paul Schäfer Schneider
출생 1921년 12월 4일
바이마르 공화국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트로이스도르프
사망 2010년 4월 24일 (향년 88세)
칠레 산티아고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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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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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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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야코프 섀퍼 (부)
안나 섀퍼 (모)
학력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종교 개신교
직업 종교인
소속 콜로니아
서명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

1. 개요2. 생애3. 활동4.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 출신의 종교인. 콜로니아의 설립자였다.

2. 생애

1921년 12월 4일에 근처의 트로이스도르프 마을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의 이혼과 형편없는 학업 성적 등으로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사고로 한쪽 눈이 멀어 항상 의안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섀퍼는 어릴 때 히틀러 유겐트에 참여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프랑스에 있는 독일군의 야전 병원에서 의무병으로 복무한 전적이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8년부터 섀퍼는 오순절주의 계열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청년 지도자로 일하다가 1951년에 소년들을 성추행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출교당한 후 독일 전역을 순회하는 설교자로 일했으며, 1953년에 어린이집과 고아원을 설립한 후 동프로이센의 난민들을 받아들이며 미성년자 사회 복지사로 일하다가 1959년에 2명의 소년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자 1961년 1월에 칠레로 이주한 후 숲이 울창한 칠레 남부에다가 면적 130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에 300여명이 거주하는 독일인 농업 공동체 콜로니아 디그니다드(Colonia Dignidad)를 만들고 이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리적, 신학적으로 '늦은비 운동'으로도 알려진 윌리엄 브랜험(William Branham)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2]

3. 활동

콜로니아는 명목상으로는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 등을 제공했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바이에른의 농민의 옷을 입고 독일의 민요를 노래하며 일하는 등 독일 전통 농촌의 모습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한때 가난한 독일 주민들이 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섀퍼는 본색을 드러내고 이곳은 지옥으로 변했다. 콜로니아의 실태는 가히 칠레판 아가동산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3].

콜로니아는 '칠레의 법률이 미치는 곳은 콜로니아의 현관까지'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독특하다 못해 엽기적인 규율을 자랑했는데, 먼저 섀퍼는 원시 기독교 시대의 공동체를 모델로 정착지를 만들었다지만, 실제 섀퍼는 성경의 내용을 왜곡해서 사실상 감옥과도 같은 곳을 만들었다. 콜로니아의 사람들은 6~7살밖에 안된 아이마저 매일매일 하루에 16시간 동안 무봉급 강제노동을 해야 했고, 휴일은 섀퍼의 생일인 12월 4일 단 하루밖에 없었으며, 이렇게 가혹한 노동을 해야 했던 사람들은 구타나 고문 등의 온갖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당시 콜로니아 내에서 행해진 나치 스타일의 조사와 고문들은 칠레 정부가 행했던 그것보다도 더 '무거웠다'고 한다[4].

또한 섀퍼는 "아동교육의 문제는 아이들에게 있지 않다. 이 문제는 항상 그들의 부모에게 잇는데, 왜냐하면 아이들의 죄에 대한 책임은 부모에게 있기 때문이다"라며 주장하며 콜로니아 주민들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나면 출산 직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떨어뜨린 뒤 보모의 품에서 자라게 했으며, 가족끼리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끼리 만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이렇게 콜로니아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차갑고 무기력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섀퍼는 외부로부터의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TV, 전화, 심지어 달력도 금지시켰는데, 이렇게 완전히 고립된 콜로니아에서 섀퍼는 '신의 다음에 오는 존재'로 숭상되었다.

게다가 바깥은 센서가 붙은 8피트 높이의 가시철선 울타리, 군인과 경찰이 24시간 지키고 있었고, 겨우겨우 탈출한 사람은 해외까지 쫓아가 강제로 송환시켰기 때문에 콜로니아는 탈출이 애초에 불가능한 곳이었다. 실제로 콜로니아에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36년간 단 5명밖에 없었다.

1973년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로 집권하자 섀퍼는 이곳을 반정부 인사 강제 수용소로 운영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섀퍼는 요제프 멩겔레[5] 등의 악랄한 나치 전범들을 콜로니아에 넣어 보호했으며, 내부에는 나치 잔당들의 재산과 무기 밀매 등으로 구한 로켓포나 전차 등을 포함한 수많은 무기를 저장한 창고를 두고 있었고, 심지어 준군사조직 기지가 있어 여기서 군인들이 훈련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섀퍼는 "여성은 성욕이 통제되지 않으면 남성을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유혹자다.", "성관계는 악마의 도구다."라고 주장하며 주민들에게는 성관계를 금지시키거나 남녀를 격리시켰고, 심지어 성욕 억제제 복용을 강요하는 등 순결을 강요한 주제에[6] 정작 본인은 하루에 서너명씩 소년 위주로 죄 없는 아이들을 매일같이 성폭행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6살밖에 안된 아이에게까지 성폭행을 가하는 극악무도한 행각까지 저질렀다.[7] 그리고 섀퍼는 소년들의 성욕을 관리한다는 명목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을 손수 전기고문 등으로 고문하거나 굶기기도 했으며, 자신에게 성폭행당해 종속당한 아이들은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칭송했다. 이런 과정에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수학 교수로 일하던 유대계 소련인 보리스 바이스필러(Boris Weisfeiler, 1941~1985?)[8]를 포함한 최소 100여명이 콜로니아 내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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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담


[복수전공] [2] 아이러니하게도 브랜험의 영향을 받은 자들 중에는 섀퍼와 사상적으로 극단적 정반대인 짐 존스가 있었다. [3] 참고로 아가동산의 교주 김기순의 아가동산에서의 행적은 파울 섀퍼와 거의 평행이론 수준으로 똑같았다. [4] 실제로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에서는 SS 게슈타포 출신 인사들이 칠레의 비밀 경찰들에게 자신들이 쓰던 고문 방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5] 이곳에서 멩겔레는 섀퍼에게 사린가스 사용법을 전달했는데, 섀퍼는 이를 칠레의 비밀경찰에게 전수해줬다고 한다. 참고로 멩겔레는 파라과이의 군사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물론 스트로에스네르 역시 섀퍼와 비슷한 극악무도한 연쇄 아동 성폭행범이었다). [6] 실제로 콜로니아에서 태어난 아이는 겨우 60명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1975년과 1989년 사이에는 새로 태어난 아이가 아예 없었다고 한다. [7] 참고로 콜로니아에서는 전술한 것처럼 가족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 아이들이 성폭행 피해자가 되어도 부모에게 요청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다. [8] 1984년 크리스마스에 칠레로 하이킹을 하러 갔다가 1985년 1월 초에 실종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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