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술탄국 술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쉴레이만샤 1세 | 클르츠 아르슬란 1세 | 멜리크샤 | 메수드 1세 | |
<rowcolor=#fff>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클르츠 아르슬란 2세 | 케이휘스레브 1세 | 쉴레이만샤 2세 | 클르츠 아르슬란 3세 | |
<rowcolor=#fff> 제6대2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
케이휘스레브 1세 | 케이카우스 1세 | 카이쿠바드 1세 | 케이휘스레브 2세 | |
<rowcolor=#fff>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케이카우스 2세 | 알라엣딘 케이쿠바트 2세 | 클르츠 아르슬란 4세 | 케이휘스레브 3세 | |
<rowcolor=#fff> 제16대 | 제17대 | 제16대2 | ||
메수트 2세 | 알라엣틴 케이쿠바드 3세 | 메수트 2세 |
}}} }}}}}} |
페르시아어, 아랍어 : قلج ارسلان
튀르키예어 : Kılıç Arslan
생몰 : 1079년 ~ 1107년 6월 3일
재위 : 1095년 ~ 1107년 6월 3일
1. 개요
룸 술탄국의 2대 술탄. 군중 십자군을 전멸시키고 니케아를 지켜내었으나 이로써 십자군을 과소평가하고 다니슈멘드 왕조와의 싸움에 치중하다 제1차 십자군에게 수도를 잃었다.[1] 콘야로 천도한 그는 절치부심하여 1101년 롬바르드 십자군을 메르지푼에서, 느베르-아키텐 십자군을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괴멸시켰다. 이러한 참사들로 인해 십자군의 진로는 육로 대신 점점 해로를 택하게 된다.안정적으로 아나톨리아를 통치하던 클르츠 아르슬란은 1107년 모술 시민들의 초청으로 남하했다가 알레포-셀주크 연합군에 패한 후 도주하다 하부르 강에서 익사하였다. 이때 장남 멜리크샤가 포로가 되었다가 1110년에야 콘야로 돌아와 계승한다. 서양권에서 그는 십자군에 맞선 첫 무슬림 군주로 알려져 있다. 동로마와 십자군의 압력으로 무너질뻔 했던 룸 술탄국은 클르츠 아르슬란의 지도 하에 장기간 존속할 토대가 마련되었다.
2. 생애
클르츠 아르슬란은 칼의 사자라는 뜻이다.[2] 부친 쉴레이만샤 1세는 동로마 내전을 틈타 1077년 니케아를 점령했고, 1081년 알렉시오스 1세의 즉위를 도우며 그 일대의 지배권을 공인받아 술탄을 칭하였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두 시기의 사이인 1079년 니케아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셀주크 술탄 말리크샤 1세의 동생 투투쉬는 시리아를 정복하였다. 쉴레이만샤 1세는 1083년 킬리키아를 병합하며 아나톨리아 서부와 남부를 평정하였고 시리아를 노렸다. 1085년, 알렉시오스 1세의 승인 하에 안티오크를 점령한 쉴레이만샤는 파죽지세로 알레포를 포위하곤 우카일 왕조의 아미르를 전사시켰으나 이듬해 투투쉬에 패해 전사하였다. 원정에 동행했던 7세의 클르츠 아르슬란은 포로가 되어 이란으로 압송되었다.6년간 이스파한에 유폐되어 있던 그는 1092년 말리크샤 1세가 사망하고 도래한 혼란기에 간수들이 다투는 틈을 타서 탈출하여 아나톨리아로 돌아왔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오우즈 계열의 이바 부족을 이끌고 니케아로 돌아와 말리크샤가 임명한 총독 아미늘 가즈니를 축출하고 술탄에 올랐다. 동시에 다니슈멘드, 살투크 왕조, 아르투크 왕조, 아흘라트샤 등이 자립하며 완충 지대가 생기자 룸 셀주크는 비로소 셀주크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스미르나 ( 이즈미르)의 군웅 차카의 딸 아이셰 하툰과 결혼하여 첫 튀르크 해군을 지닌 그와 동맹하였다. 하지만 1094년 차카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준비하자 그는 알렉시오스 1세와 몰래 결탁하고 스미르나로 향하여 장인을 연회에 초대한 후 독살하였다.
2.1. 대 십자군전
1096년 수도 니케아 앞에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2-3만의 민중 십자군이 당도하자 클르츠 아르슬란은 기병대를 이끌고 나아가 이들을 격파하였고, 레이날드의 선발대가 점거한 제리고르돈 요새를 봉쇄하였다. 보급도 없이 갇혀버린 레이날드의 선발대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레이날드 등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포로가 되거나 학살되었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은자 피에르의 본대에 선발대가 성과를 얻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본대 역시 제리고르돈으로 향하였다가 매복을 당하여 괴멸되었다. 은자 피에르를 포함한 소수만이 동로마 해군에 구출되어 도주하였다. 대승을 거둔 클르츠 아르슬란은 서방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 동쪽의 다니슈멘드를 침공하여 말리크 가지 귀뮈쉬티긴과 싸웠다.1097년 봄, 이번에는 1차 십자군이 당도하여 니케아를 포위하였다. 말라티아 공방전을 벌이던 클르츠 아르슬란은 말리크 가지와 휴전을 맺고 회군하여 구원에 나섰으나 격퇴되었고, 니케아 수비대는 한달여 항전 끝에 동로마 측에 항복하였다. 십자군의 기대와 달리 알렉시오스 1세는 옛 동맹인 클르츠 아르슬란의 처자식을 아무 조건 없이 석방해주었다. 한편 클르츠 아르슬란은 십자군의 위력을 통감하곤 귀뮈쉬티긴과 동맹을 맺었고, 룸-다니슈멘드 연합군은 그해 6월 도릴라이온 전투에서 흩어져 있던 십자군을 매복했으나 보에몽의 역습에 패퇴하였다. 연패를 겪은 클르츠 아르슬란은 더이상 십자군과의 정면 대결을 포기하고 경기병 위주의 게릴라와 치고 빠지기 및 청야 전술로 전환하였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