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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01:25:42

클르츠 아르슬란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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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큰 앗 딘 킬리지 아르슬란
페르시아어, 아랍어 : رکن الدین قلج ارسلان بن کیخسرو
튀르키예어 IV. Kılıç Arslan

생애 1237년 ~ 1266년
재위 1249년 ~ 1266년

1. 개요2. 즉위3. 페르와네의 전횡과 죽음

1. 개요

룸 술탄국의 14대 술탄. 케이휘스레브 2세의 차남으로, 본래 몽골 제국과 권신 페르와네의 지지를 받아 1249년 공동 술탄을 거쳐 1256년 단독 술탄에 올랐다. 다만 1260년대 들어 페르와네의 전횡에 맞서던 그는 결국 전자와 몽골측 총독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후 아들 케이휘스레브 3세가 옹립되었고, 이때부터 룸 술탄들은 완전히 재상과 몽골 총독에 의해 가려져 실권을 거의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2. 즉위

1246년 부왕의 사후 형 케이카우스 2세의 즉위에 불복하여 카라코룸으로 향한 그는 구유크 칸의 대관식에 참석, 대칸의 환심을 사서 술탄으로 봉해졌다. 2년 후 토카트로 돌아온 그는 술탄을 칭하였고, 1249년 대칸의 칙령을 내세워 재상 이스파하니를 소환한 후 처형하였다. (클르츠 아르슬란 4세) 후임 재상 젤랄레틴 카라타이는, 형제들의 분란을 종식시키고자 케이카우스-클르츠 아르슬란-케이쿠바트 모두를 술탄으로 인정하는 협정을 맺게 하였다. 아나톨리아 중북부를 흐르는 크즐으르막 강을 경계로 서쪽은 케이카우스, 동쪽은 클르츠 아르슬란과 케이쿠바트의 영토가 되었다.

3. 페르와네의 전횡과 죽음

카이세리를 중심으로 말라키아와 시바스 일대를 다스리던 클르츠 아르슬란은, 1254년 케이쿠바트가 사망하자 재차 케이카우스와 군사 충돌을 벌였으나 패배하였다. 다만 그를 지지하던 권신 페르와네 (무이뉫틴 쉴레이만)는 훌라구 칸과 공모하여 바이추의 케이카우스 토벌을 이끌어내었고, 후자가 축출되자 클르츠 아르슬란은 단독 술탄이 되었다. 다만 케이카우스의 잔존 세력은 여전히 저항하였고, 1261년에야 셀주크-몽골군은 콘야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클르츠 아르슬란은 술탄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실리프케를 점령하였다.

한편 페르와네는 기존 케이케우스의 영토를 술탄이 아닌 자신의 측근들에게 배분하며 사실상 독자 세력을 구축하였고, 이에 클르츠 아르슬란이 반발하며 둘은 대립하게 되었다. 1265년 페르와네는 트라페주스 제국에게서 시노프를 점령하며 군부의 지지를 얻어내었다. 이를 바탕으로 페르와네는 몽골의 룸 총독 나브쉬 노얀에게 클르츠 아르슬란이 비밀리에 바이바르스와 접촉하며 몽골에 저항할 군대를 양성 중이라 고발하였다. 훌라구 칸의 허가 하에 나브쉬 노얀은 클르츠 아르슬란을 연회에 초청하여 암살하였고, 페르와네는 어린 왕자 케이휘스레브 3세를 옹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