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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4 14:24:49

쿨린

보스니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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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제2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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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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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улин}}}
출생 미상
사망 1204년 (향년 불명)
재위 보스니아
1180년 ~ 1204년
배우자 바이카 보이슬라바
자녀 스테판 쿨리니치
가문 쿨리니치 가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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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 등장하는 보스니아 반샤그 제2대 반(Ban).

2. 행적

기원은 불확실하다. 일부 기록은 보리치의 아들이라고 기술했지만, 신빙성은 없다. 다만 여러 학자는 그가 보리치의 친척일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그는 모종의 시기에 보스니아 귀족 대표로서 활동했고, 1180년 보스니아를 지배하던 동로마 제국 마누일 1세 사후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반(Ban)에 추대되었으며, 이후 헝가리 왕국의 가신이 되었다. 1183년,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냐와 함께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한 헝가리 왕국 벨러 3세의 지휘 아래 전쟁에 참여했다. 헝가리-세르비아 연합군은 동로마군을 모라바 계곡에서 몰아내고,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라브노, 니시, 소피아를 연이어 공략했다.

그 후 쿨린은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고 국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당시 그의 영역은 동쪽의 드리나 강에서 서쪽의 크라예보 강까지, 북쪽의 사바 강에서 남쪽의 네레트바강까지 뻗었으며, 경제는 눈에 띄게 발전했다. 1189년 8월 29일, 쿨린은 라구사 공화국을 상대로 라구사 시민들의 무역 특권을 보장하는 <반 쿨린 헌장>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 보스니아 반 쿨린은 당신과 크르바슈 왕자, 그리고 두브로브니크의 모든 시민이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의 진정한 친구가 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들과 함께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올바른 신뢰를 베풀 것이다. 어떠한 악의도 없이 진정한 신뢰와 마음으로 자유 의지로 나에게 선물을 주는 모든 두브로브니크(라구사) 시민들은 내가 통치하는 지역으로 찾아와서 거래하고,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내 장교들로부터 어떠한 외압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떤 악의도 없이 가능한 한 그들을 도와주겠다. 하느님께서 나와 이 거룩한 이들을 돌봐주길 바란다.

그러던 1199년, 제타 공작 부칸 네마니치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쿨린을 고발했다.
헝가리 왕의 봉국인 보스니아에서 쿨린이 그의 아내와 누이, 친척 몇 명과 함께 이단에 빠졌습니다. 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개종했습니다.

부칸 네마니치가 지적한 이단은 바로 보고밀파로, 세상은 육신과 영혼의 대립 및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이뤄졌다는 영지주의를 신봉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는 미카엘 사타나엘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미카엘이 나중에 예수가 되었고 물질 세계는 사타나엘이 만들었다고 여겼으며, 하느님이 만든 영적 세계는 선하지만 사타나엘이 만든 육적 세계는 악하므로 금욕을 통해 영적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부칸의 고발을 접한 인노첸시오 3세는 1200년 헝가리 국왕 임레에게 보스니아에 대한 개입을 요청했다.

쿨린은 이 일련의 상황을 전해듣고 장차 십자군이 보스니아에 들이닥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교황청에 즉시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에서, 그동안 이단자와 참된 신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몰랐다면서, 교황이 보스니아에 특사를 보낸다면 어떤 지시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이를 받아들여 이반 카자마리스를 보스니아로 파견했다. 이반 카자마리스는 라구사 대주교 마린과 함께 1203년 4월초 보스니아에 도착했다. 그는 즉시 쿨린과 기독교 장로, 귀족 및 민중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카자마리스는 장로들과 문답을 주고받은 후, 그들의 믿음이 왜곡되었음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정통 신앙으로 회귀하라고 요구했다. 장로들은 이에 동의했고, 1203년 4월 8일 이단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빌리노폴스카 칙령>에 서명했다. 이 칙령엔 쿨린 본인과 라구사 대주교 마린도 서명했다. 카자마리스는 문제가 깔끔히 해결되었다고 여기고 헝가리로 이동했고, 1203년 6월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 보스니아의 이단자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알렸다. 그러나 쿨린과 신하들, 그리고 민중은 십자군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으로 회개한 것일 뿐, 실제로는 보고밀파를 고수했다. 훗날 교황청은 보고밀파가 보스니아에서 지배적인 교리로 등극했음을 확인하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보스니아 십자군을 단행한다.

쿨린은 자후믈례 공작 자비다의 딸이자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냐의 여자형제인 바니카 보이슬라바와 결혼해 아들 스테판 쿨리니치를 낳았다. 1204년경 쿨린이 사망한 뒤, 스테판 쿨리니치가 보스니아 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