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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8 14:36:40

쿠낙사 전투

파일:쿠낙사 전투.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아케메네스 왕조군3.2. 키루스 반란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기원전 401년 9월 3일 바빌론에서 북쪽으로 70km 떨어진 쿠낙사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키루스 왕자가 왕중왕의 계승을 놓고 맞붙은 전투. 크세노폰의 저작 아나바시스의 배경으로 유명한 전투이다.

2. 배경

기원전 404년, 아케메네스 왕조 제12대 왕중왕 다리우스 2세가 병사했다. 이때 아내 파리사티스는 즉위 후 처음으로 낳은 자식인 둘째 아들 키루스에게 왕위를 물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다리우스 2세는 즉위하기 전에 낳은 첫째 아들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키루스는 형의 대관식에 참가했다가 왕중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을 뻔 했지만, 어머니 파리사티스가 중재한 덕분에 사형을 모면했다.

이후 사르디스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보내진 키루스 왕자는 형이 언젠가 자신을 제거할 거라 예상하고, 반란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추방된 스파르타인 클레아르코스를 고용하여 그리스 용병대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겼다. 클레아르코스는 그리스 전역에 용병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낸 후, 트라키아에 모인 용병대를 훈련시켰다.

처음 집결한 병력은 1,000명의 호플리테스, 800명의 트라키아 펠타스트, 200명의 크레타 궁수, 그리고 40명의 기병이었다. 키루스는 이들을 테살리아로 이동시켜 유지 비용을 지불했고, 라리사의 아리스티포스에게 4,000명의 전사를 고용할 돈을 주었다. 한편, 키루스 왕자의 최측근인 크세니아는 소아시아에서 비슷한 숫자의 용병을 모았다.

키루스 왕자는 표면적으로는 사르디스의 유목민족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반란에 동원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키루스는 이오니아 남부 지역에서 사트라프 탓사페르네스의 지지자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는 이를 빌미 삼아 3명의 그리스 사령관이 지휘하는 창병 1,800명과 척후병 300명을 모집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용병대의 규모는 10,400명의 호플리테스와 경방패병에 투석병과 궁수까지 포함한 2,500명의 경무장보병이었다.

물론 키루스는 그리스 용병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훨씬 더 많은 페르시아 병력을 모았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기록마다 다르지만 대략 2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3,000명의 기병대와 20대의 채리엇으로 구성된 기마 병력이 키루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의 핵심 전력이었다.

그리스 용병대는 유목 민족과의 전투에 투입될 거라는 이야기만 듣고 왔기 때문에, 키루스가 바빌론 쪽으로 군대를 이동시키자 항의했다. 이에 키루스는 좋은 말로 달래고 재물을 아낌없이 나눠줘 용병대를 달랬다. 그러다가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렀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목적을 솔직히 밝혔다. 그는 그리스 용병대의 용맹함을 칭송하며, 그들이라면 페르시아인을 어렵지 않게 격파할 것이며, 이번 전투에서 이긴다면 수많은 금은보화를 아낌없이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스 용병대는 페르시아 영토 깊숙이 진군했기 때문에 이제와서 돌아가기는 힘들었고, 자기들에게 잘 대해주고 재물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키루스 왕자의 인격에 감화되었다. 게다가 이번에 이기면 금은보화를 베풀어주겠다고 하자, 그들은 키루스 왕자를 위해 싸우기로 다짐했다. 이후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행진하다가 바빌론에서 북서쪽으로 80km 떨어진 '쿠낙사'라는 작은 마을에 이르렀을 때, 정찰병들이 거대한 규모의 적군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본대에 알렸다. 이리하여 쿠낙사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아케메네스 왕조군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에서 자신들을 상대하는 페르시아군의 규모가 120만에 달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를 지나친 과장으로 간주한다. 학자들은 6만~10만 가량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기병대 6,000명과 150~200대의 채리엇이 배치되었다는 아나바시스의 기록은 타당하다고 본다. 이들은 총 다섯개 부대로 구성되었다. 처음 3개 부대는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 엘람인, 시시아인, 그리고 히르카니아인으로 구성되어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네번째 대열은 이집트인, 다섯번째 대열은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궁수 및 펠타스트로 구성된 20,000명 가량의 경보병대도 있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사트라프 탓사페르네스가 지휘하는 3분의 1 가량의 기병대를 강둑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 방향에 배치했다. 경보병대가 그 뒤에 배치되었고, 그 다음엔 이집트인으로 구성된 창병대가 좌익 진형을 형성했다. 중앙에는 중무장 보병대가 집중배치되었고, 전방에는 절반 가량의 채리엇들이 전진 배치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중앙 대열에서 다소 떨어진 후방에 있었고, 2,000명의 기병대가 근위부대와 함께 왕중왕을 경호했다. 우익에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메디아 등으로 구성된 혼성부대가 배치되었고, 그 앞에는 나머지 절반 가량의 채리엇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3분의 1 가량의 기병대가 우익 측면에 배치되었다.

3.2. 키루스 반란군

아나바시스에 따르면, 그리스 용병대는 10,400명의 호플리테스와 2,500명의 경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행진하다가, 적과 맞닥뜨리게 되자 키루스가 급히 편성한 대열의 우익에 집중 배치되었다. 크세노폰은 그리스 용병대의 오른쪽에 기병대 1,000명이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키루스와 함께 있었다고 기록했다.

좌익과 중앙에는 키루스가 동원한 페르시아 보병대가 배치되었는데, 그 숫자는 그리스 용병대의 2배에 달했다고 한다. 키루스 본인은 600명의 근위 기병대와 함께 그리스 용병대의 왼쪽 측면의 중앙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좌익 및 좌측면을 맡아야 했던 바바리안 보병대와 기병대는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했다.

4. 전투 경과

아나바시스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키로스의 부대와 마주치고는 싸울 생각이 없는 듯 짐짓 후퇴를 거듭하다, 키로스군이 경계를 느슨하게 하는 듯 하자 기습을 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 용병대는 이를 거뜬히 격퇴했다. 이후 그리스 용병대의 지휘를 맡은 클레아르코스는 수적으로 훨씬 많은 페르시아군 좌익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그리스 용병대는 맹렬한 기세로 돌격하였고, 페르시아 좌익 부대는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전열이 무너졌다.

한편, 키루스 왕자는 아리아에우스가 이끄는 기병대와 야만인 보병대가 좌익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그의 근위병들과 함께 중앙을 굳건히 지켰다. 하지만 아리아에우스의 기병대는 이제 막 모습을 드러냈고, 야만인 보병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페르시아군 우익에 배치된 채리엇 및 기병대 일부가 아직 제대로 배치되지 않은 키루스의 좌측면을 돌파한 후, 후방 기지에 쌓인 군수물자를 약탈하려 했다.

키루스는 이 시점에서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아리아에우스의 기병대 및 야만민 보병대가 완전히 합류하여 최상의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자부심이 강하고 공격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던 그는 그러는 대신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있는 적의 중앙 대열을 급습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적 중앙부대는 아군 좌익이 그리스 용병대에게 박살나는 걸 보고, 그리스 용병대의 측면을 후려치려 했다. 키루스는 중앙 부대 및 근위병 600명을 이끌고 직접 적 중앙부대의 움직임을 저지한 뒤, 내친 김에 적 중앙을 파고들었다.

그의 공격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위치한 지점 인근까지 파고들 수 있었다. 키루스 왕자는 형을 목격한 순간 흥분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형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지키던 근위 기병들이 앞을 가로막았고, 키루스는 그들과 격렬한 격투를 벌이다 투창에 맞아 전사했다. 그를 따르던 600명의 근위대 역시 대부분 전사했다.

눈앞에서 키루스가 전사한 광경을 목격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일단 전군에 후퇴한 뒤 후방에서 재정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적군 좌익을 미친듯이 몰아치던 그리스 용병대는 적 기병대 일부가 후방 기지를 점거한 걸 보고 공세를 멈춘 뒤 기지로 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페르시아군이 그들을 추격했지만, 그리스 용병대의 팔랑크스 대형을 뚫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후 그리스 용병대는 기지로 복귀하여 적을 쫓아내고, 황폐해진 주둔지를 재정비했다. 이리하여 쿠낙사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 따르면 그리스 용병대는 쿠낙사 전투에서 적군을 두 번이나 궤주시켰고, 단 한 명만 부상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둔지를 수복한 그들은 곧 키루스 왕자가 전사했고 다른 부대는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들은 키루스 왕자의 심복인 아리아에우스에게 왕중왕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아리아에우스는 자신이 고귀한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며 거절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후계자 분쟁이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에 굳이 그리스 용병대와 다시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 대신 용병대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그리스 용병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중간까지는 페르시아 왕과 싸울 생각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왕중왕은 클레아르코스와 그의 부하들이 이오니아로 돌아가는 걸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트라프 탓사페르네스는 그들이 그냥 돌아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열흘 동안 군대를 이끌고 이오니아로 돌아가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다가 아리아에우스와 그의 아시아 군대가 그리스 용병대와 분리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후 탓사페르네스는 클레아르코스와 용병 지휘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이에 클레아르코스와 200명의 장교들은 보급품을 받기를 희망하며 만찬에 참석했다가 흉계에 속아 전원이 죽었다. 오직 중상을 입은 한 명만이 흘러나오는 자신의 내장을 붙잡은채로 살육에서 빠져나와 용병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용병대는 지휘부가 몰살당하자 절망에 빠졌지만, 이내 지휘관을 다시 뽑았다. 최고 책임자는 케이리소포스였으며, 그를 보좌하는 장교 중에는 크세노폰도 포함되었다. 이후 그들은 온갖 곤경을 헤쳐나가며 이오니아로의 탈출을 감행했으며, 크세노폰은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아나바시스를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