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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10:17:15

콘스탄틴 패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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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초대 대통령
콘스탄틴 패츠
Konstantin Päts
파일:Konstantin Päts.jpg
<colbgcolor=#096fc1> 출생 1874년 2월 24일
러시아 제국 리보니아 타쿠라나
사망 1956년 1월 18일 (향년 81세)
소련 러시아 SFSR 칼리닌주 부라셰보
국적 에스토니아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학력 타르투 대학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직업 정치인
가족 배우자: 이다 에밀리 패츠(Ida Emilie Päts)
슬하: 2명
경력 에스토니아 제1대 대통령
재임기간 1938년 4월 24일 ~ 1940년 7월 23일
서명 파일:콘스탄틴 패츠 서명.svg

1. 개요2. 일생
2.1. 학창시절2.2. 초기 정계 활동2.3. 독재2.4. 추방, 죽음
3. 평가

[Clearfix]

1. 개요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의 제1대 대통령이자 독재자이며, 리투아니아의 안타나스 스메토나, 라트비아의 카를리스 울마니스와 함께 20세기 초반 발트 3국[1]의 역사를 다룰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2. 일생

콘스탄틴 패츠는 1874년 2월 23일 러시아 제국 치하 에스토니아의 타쿠라나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스토니아가 소련에 합병되기 직전인 1938~40년 에스토니아의 마지막 대통령을 지냈다.

2.1. 학창시절

패츠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타쿠라나의 정교교구학교에 다녔다. 이후 그는 패르누 근처로 이주했다. 이후 라트비아 리가에서 성직자 교육을 받았지만, 중퇴했다. 이후 그는 타르투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이후 그는 졸업 후 옴스크 러시아 제국 제96 보병연대에 복무하고 소위로 승진했다.

2.2. 초기 정계 활동

이후 타르투에서 학자가 되기를 포기하고뭐이리 자꾸 포기해, 탈린으로 이주하여 정계에 들어갔다.

그는 1901년 에스토니아어 신문인 "테아타야" (Teataja) 를 창간하여 출판업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신문에는 그의 사회주의적 경향이 반영되었다.

1904년에는 탈린의 부시장이 되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과 연계되어 에스토니아에서도 봉기가 일어나자,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에스토니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10년이 되어서야 에스토니아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돌아온 후에 잠시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에스토니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수차례 투옥되었고, 그의 아내는 끝내 병으로 죽었다.[2]

이후 패츠는 1916년 탈린에서 러시아 제국의 장교 생활을 했다. 독일 제국군이 에스토니아에 접근해 오자 러시아 제국에 대한 징병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며, 1918년 2월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선언되자 임시정부의 의장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에스토니아를 점령한 독일군에 의해 즉각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1918년 휴전이 이루어진 후 다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2.3. 독재

이후 그는 1921~22, 1923~24, 1931~32, 1932~33, 1933~34년 5번에 걸쳐 에스토니아의 국가원수[3]를 역임했다.

보다 강력한 행정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헌법이 1933년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되고 난 후 그는 이 헌법을 지지했던 파시스트 조직 ' 밥스 운동(Eesti Vabadussõjalaste Liit, Vapsid)'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1934년 그는 이 운동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4] 권력을 장악했으며 언론과 기타 정당을 탄압하는 등 독재정치를 하였다. 그의 독재 시기를 "침묵의 시기(Vaikiv Ajastu)"라고도 한다. 1938년에는 대통령직을 신설하여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2.4. 추방, 죽음

그의 권위주의적 정권은 1940년 6월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패츠는 점령 초기에 탈출을 시도했다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 모스크바의 정치범 감옥에 수감되었다. 나중에는 그가 전직 에스토니아 대통령이라는 '미친 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귀양지인 러시아 SFSR 트베리 주의 정신병원에서 강제입원된 후 1956년 사망하였다. 향년 81세. 그의 가족들도 시베리아의 굴라크에 보내졌다. 이후 1990년 그의 유골이 탈린으로 옮겨졌다.

3. 평가

그의 집권 시기 에스토니아는 근대화 개혁으로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지만 민주주의의 발전은 더뎌졌다는 평가가 많다.


[1]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2] 그러나 이후 그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그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3] 에스토니아어 Riigivanem, 영어 State Elder [4] 밥스의 주요 지도자였던 아르투르 시르크(Artur Sirk)는 탈출해서 룩셈부르크에 정착했다가 1937년 자살했다. 다만 일부 에스토니아 역사가들은 시르크가 패츠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추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