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開成高校生殺人事件1977년 일본에서 당시 남고생이던 사토 켄이치가 살해당한 비속살인 사건. 사건의 내용 때문에 각종 대중매체에서도 많이 다뤄진 사건이다.
2. 사건의 전개
1977년 10월 30일 도쿄도 키타구의 한 아파트에서 카이세이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남고생 사토 켄이치(佐藤健一, 당시 16세)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전 켄이치는 느닷없이 "내 청춘을 돌려줘! 인생을 돌려내! 엉망진창으로 만든 건 다 부모야!" 라는 등의 말을 외친 직후 잠이 들었다고 한다. 자정이 되자 켄이치의 부친(이하 A, 당시 47세)이 장롱에서 길이 약 1.5m 가량의 끈을 꺼내 2층에 있는 켄이치의 방으로 향했고 그 끈으로 자고 있던 아들을 목졸라 살해했다.범행 직후 켄이치의 모친(당시 44세)[1]이 방으로 들어오자 A는 눈물을 흘리면서 아내에게 "아들을 죽였다. 나도 죽으려 한다"고 말했고 모친은 자신도 죽겠다며 한동안 부부가 함께 울었다고 한다. 새벽 4시경 동반자살을 결심하고 함께 자택을 나와 택시로 도쿄역까지 갔고 도중에 범행 도구로 사용한 끈을 버리고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의 하마나 호숫가를 찾았다. 그러나 막상 동반자살을 결심하고도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해 결국 그 날은 호텔에 머물렀고 그 사이 부부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와 혼자 남을 할머니에 대해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A는 자수하려고 마음먹었고 다음 날 택시로 도쿄에 돌아가 아내와 함께 경시청 아카바네 경찰서를 찾아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이 사건은 피해자인 켄이치가 일본 최고의 명문고인 카이세이고 재학생이었다는 점 때문에 큰 화제가 되었는데 아버지가 명문고에 다니던 아들을 살해한 데다 후술될 범행 동기가 맞물려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일본 사회를 충격과 경악에 빠뜨렸다.
3. 범행 동기
A의 범행 동기는 다름아닌 아들 켄이치의 심각한 가정폭력이었다. 1977년 5월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후 켄이치는 집 안에서 난동을 부려 가족들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거칠어졌으며 모친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었기 때문에 A가 주의를 줘도 켄이치가 이에 반발하면서 부자간에 심한 말다툼이 벌어지곤 했는데 결국 참다 못한 부친 A가 급기야 "집안에서 싸워 봐야 소용없다. 앞으로 너와는 일체 말 섞을 일 없을 테니, 너도 엄마한테 간섭하거나 때리거나 하지 마라. 만약 앞으로도 엄마 때린다거나 하면, 나도 가만 안 두겠다. 나도 널 때릴테니 그렇게 알아라"고 선언하기에 이르게 되었다.그러나 이후에도 켄이치의 폭력성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고 1977년 8월에는 모친이 그 날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켄이치에게 말을 건넸다가 갑자기 격앙한 아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모친이 아들을 피해 내내 도망다니는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2] 그날 저녁 퇴근한 A가 켄이치에게 주의를 주자 켄이치는 "사회적인 지위도, 명예도 없는 주제에 무슨 개소리냐", "당신들 같은 부부가 나를 낳아서 내 인생이 망했다"는 등 적반하장으로 고함을 지르면서 계속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 무렵의 켄이치는 폭력성이 한층 더 심해져서 급기야 8월 말경에는 함께 살던 할머니[3]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결국 노이로제 상태가 된 할머니가 2~3일 정도 여관에 피신하는 일까지 벌어지기에 이르게 되었다. 심지어 아들의 폭력 때문에 A는 아예 이타바시구에 따로 아파트를 얻어 기거하면서 사실상 '피난처'로 사용했는데 이 아파트는 이후 모친과 할머니도 '피난처'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심상치 않은 아들의 폭력성 때문에 A는 조현병[4]을 의심해서 정신과를 여러 곳 다니며 진료를 받았으나 의사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정신적인 병리가 아니라 단순히 아이의 성향 자체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뿐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부모가 입원을 요청해도 거부당한 탓에 몇 차례 통원치료를 받았지만 켄이치의 폭력성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5] 그러다 사건 발생 7일 전 아침에는 켄이치가 A의 머리에 접시를 내리쳐 상해를 입히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6] 특히 마지막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가뜩이나 아들의 폭력 때문에 심신이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A와 모친에게 정신과 의사는 "아이가 자살을 하던지, 범죄자가 되던지 둘 중 하나다", "(아들의) 직성이 풀릴 때까지 날뛰게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는 무책임한 발언을 했다.
결국 의사의 무책임한 말로 인해 그나마 남은 마지막 희망마저 잃고 갈수록 심해지는 아들의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A는 이런 일이 계속되다가는 정말로 가족 중 누군가가 죽고 아들도 범죄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들 켄이치를 자신의 손으로 살해하는 극단적인 일을 저질렀다.
4. 피해자 사토 켄이치
사토 켄이치는 1961년 2월생으로, 부모가 칸다 진보쵸에서 이자카야를 경영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늘 바쁜 부모보다는 주로 함께 살던 외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에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으며 성적도 우수했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늘 혼자였다고 한다.[7] 게다가 코가 작은 것에 컴플렉스가 있었고 동급생이 이를 가지고 놀리면 보복으로 자신을 놀린 아이의 물건을 감추는 일도 있어 학부모 모임에서 성격이 나쁘다는 소리를 들은 일도 있었다. 보통 학부모 모임 등에서 특정 학생을 대놓고 성격이 좋지 않다고 지적하는 일이 어지간해서 없는 것을 감안하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학급 내에서 상당히 음습한 문제를 일으켰던 것으로 추정된다.켄이치는 초등학교 졸업 후 명문 카이세이중학교에 300명 중 56등의 성적으로 입학했다. 한때는 도쿄대학도 문제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으나 2학년 후반기 즈음부터 점차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켄이치 자신도 이를 매우 신경쓰게 되었다. 3학년으로 올라간 뒤부터는 독서에 빠지면서 스탕달의 < 적과 흑>, 장폴 사르트르 전집, 에드문트 후설의 저서 등 중학생 수준에서는 난해한 책들을 즐겨 읽곤 했지만 반대급부로 공부에는 점차 흥미를 잃으면서 성적이 점점 하위권을 밑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서서히 켄이치의 폭력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켄이치는 평소 부모를 그다지 존경하지 않았고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는 부친인 A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부모의 학력과 직업이 원인으로 보인다. A는 중졸 학력으로 이자카야를 경영했고 모친은 고졸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명문 중학교에 입학할 만큼 뛰어난 두뇌를 지녔는데 부친은 고작 중졸에 대중 음식점 따위나 경영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고 이에 심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켄이치가 가족들 중 유일하게 존경했던 인물이 외할아버지였는데 이는 외할아버지가 대기업인 운송회사 일본통운[8]의 지점장을 역임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졌다. 카이세이중고교는 일본 최고의 명문답게 학부모도 의사, 대학 교수, 변호사, 대기업 간부 등 소위 엘리트 계층뿐이었기 때문에 이것도 켄이치의 열등감을 더욱 부추겨 부친과의 사이가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카이세이고등학교에 진학[9]했으나 성적은 입학 당시부터 계속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치다가 점점 최하위권에 근접하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1학년 2학기부터는 모친을 상대로 가학성을 드러내면서 어릴 때부터 컴플렉스였던 자신의 코가 어머니 때문이라며 화풀이를 하고 심지어 모친에게 "내 코가 작은 건 엄마를 닮아서 그런 거다, 그따위 코를 달고 어떻게 밖에 싸돌아 다니냐"는 등 심한 막말을 내뱉기도 했다.[10]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은 모친이 A의 직장에 전화를 걸었고 아내의 말을 들은 A는 격분해서 전화로 켄이치를 크게 꾸짖었으나 켄이치는 도리어 "그건 명령이다. 아버지라도 나한테 명령하는 건 용서 못한다. 내가 지금까지 잔소리를 들었어도 참았는데 이제는 가만 안 있겠다. 네(아버지) 잘못이다. 그딴 여자(모친)하고 결혼하는 바람에 나같이 코가 작은 놈이 태어난 거다. 당신네들 부부는 교양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없는 것들이 무슨 사람 구실 하는 양 설교를 한다는 거냐. 부부가 쌍으로 병신들이다"라는 패륜적인 발언을 내뱉었다.
이 일을 기점으로 켄이치와 A는 말다툼이 잦아지게 되었다. 1977년 4월 켄이치는 2학년으로 진급했지만 당시 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수업 시간에 갑자기 혼자 웃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으며 수학여행도 켄이치만 유일하게 참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기본적인 용모 관리에도 소홀해지면서 앞머리가 거의 코까지 내려오도록 자랐을 정도로 방치했다고 하며 부스스하고 비듬 투성이인 머리에 늘 지저분한 코트를 입고 다녔다는 당시 동급생들의 증언도 있다. 낮에도 방 문을 전부 닫고 틀어박혀 고함을 지르거나 큰 소리로 우는가 하면 범죄나 자살, 동반자살 등과 관련된 신문 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당시 사토 켄이치가 저질렀던 가정폭력은 대략 아래와 같다. 이 정도만 봐도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모친과 할머니의 목을 조르고 구타함.
*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약 10회 가량 할머니에게 끼얹고 직후 할머니를 폭행.
* 할머니의 이부자리를 밖에 내다 버림
* 식탁을 엎음
* 온 집안에 소금, 후추, 밥 등을 마구잡이로 뿌림
* 집안을 온통 물바다로 만듦
* 집안에 세제를 풀어놓아 욕실을 거품범벅으로 만듦
* 이불을 연못에 던짐
* 연못에 의복과 책 등을 던지고 등유를 뿌리고 불을 지름
* 집안에서 의복과 책 등을 불태움
* 유리창을 부숨
* 장지문 파손
* 불단을 야구방망이로 파손함[11]
* 자신이 파손한 가구를 가족이 고쳐 놓자 다음날 다시 파손함
* 피아노 건반을 칼로 깎아냄
그러던 중 1977년 5월 26일 외할아버지마저 사망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점점 심해지던 켄이치의 폭력성은 극에 달하면서 결국 부친에게 살해당하는 단초가 되었다.
5. 사건 이후
A는 아들을 살해한 죄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모친이 법정에서 정상참작을 강하게 요청했고 이에 도쿄지방법원은 검찰 측의 징역 8년 구형에 대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는 이례적으로 상당한 선처를 했다. 검찰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1979년 2월 28일 도쿄고등법원이 항소를 기각하여 1심 판결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그러나 1심 판결 이후 켄이치의 모친은 재판 당시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며 "켄이치를 살려내라"며 남편을 힐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A의 선고가 확정되기 전인 1978년 7월 2일 모친은 아들의 방에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친의 유서에는 '(아들이 폭력성을 갖게 된)원인은 내 교육 탓이다'라며 자책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전해졌다.
사건의 범인인 A는 1987년에 만기 출소하였으나 이후의 정보가 없어 근황은 알 수 없다. 만약 생존해 있다면 2024년 기준으로 90세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12]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6. 매체에서
당시로서는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각종 드라마나 영화 소재로도 다루어졌다.* 7인의 형사·세 가족(七人の刑事・三人家族) - 1978년 TBS 드라마
* 교살(絞殺) - 1979년 영화
* 아이들의 복수~카이세이고교생 살인사건(子供たちの復讐 ~開成高校生殺人事件) - 1983년 TV 아사히 드라마. 부친 역은 이시바시 렌지, 아들 역은 사카가미 시노부가 연기했다.
7. 기타
전술되었듯 사토 켄이치는 한때 조현병으로 의심받았으나 당시 환청이나 피해망상 등 조현병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을 일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실제로 조현병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몸가짐에 신경을 쓰지 않고 수업중에 혼자 웃거나 갑자기 책상에 엎드리거나 일어서는 등의 기행을 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현병의 가능성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비정상적인 폭력적 성향 등으로 보아 심각한 성격장애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13]이 사건을 다룬 사회평론가 타카스기 신고의 저서 <입시학교 - 만들어지는 신동들(受験校 つくられる神童たち)>에서는 켄이치의 폭력 성향을 두고 우수한 성적으로 미션 스쿨 계열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카이세이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가졌던 자부심이 사건 발생 1년 전 외할아버지의 사망을 기점으로 전면적으로 붕괴되면서 자학적인 열등감을 분출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1]
1933년생.
[2]
특히 이 날은 여태껏 보여온 것보다 한층 더 심한 폭력성을 드러내며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3]
A의 모친. 즉 켄이치에게는 친할머니다. 다만 A의 부친이 그가 2세 때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하고 모친은 A가 6세가 되던 해에 재혼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정확한 관계는 불명.
[4]
당시 명칭은 정신분열증. 현재는 통합실조증으로 변경되었다.
[5]
한때는 전기충격 요법도 시도해 보았으나 전기충격 치료를 해도 그 순간뿐이었고 효과가 떨어지면 다시 폭력성을 보였다고 한다.
[6]
이때 켄이치는 식칼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A는 식칼 공격은 어찌어찌 피했으나 이후 켄이치가 내리친 접시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릴 정도로 상해를 입는 바람에 구급차에 실려가고 말았다.
[7]
이를 걱정한 할머니가 혹시 친구가 없냐고 물었지만 켄이치는 그 때마다 친구 20명 정도는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친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켄이치 자신이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8]
일본 최대 규모의 운송회사다. 한국으로 치면 대략
CJ대한통운 정도의 위상으로 보면 될 듯.
[9]
중고일관교이기 때문에 내부 진학으로 입학했다고 전해졌다.
[10]
1976년 말경에 코 성형을 받겠다며 의사에게 상담을 한 적이 있었으나 의사로부터 18세 이전에는 코가 계속 성장하기 때문에 수술이 힘들다는 말을 듣고 포기했다. 21세기에는 드문 일이 아니지만 1970년대에는 고교생이 성형외과에 상담을 하러 가는 일은 어지간해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만큼 코에 대한 컴플렉스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11]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이 짓을 저질렀다.
[12]
사건 당시 47세였으므로 역산하면 1930년생으로 추정되며 이 계산대로라면 2024년에는 94세가 된다.
[13]
다만 켄이치 본인도 심적으로 고통이 상당하기는 했는지 자신이 직접 정신과를 찾아가 진료를 받기도 하고, 앞 각주에서 언급된 전기충격 요법도 본인이 원해서 받는 등 치료에는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