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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1:56:58

청두 유비혜릉

청두 무후사에서 넘어옴
||<:><tablewidth=400px><table align=right><tablebgcolor=#FFFFFF><tablebordercolor=#CC0000><bgcolor=#CC0000><width=100> 파일: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_4.png ||<-2><:><bgcolor=#CC0000>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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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G_0053.jpg
명칭 한국어 청두 무후사
간체 成都武侯祠
번체 成都武侯祠
영어 Temple of Marquis
분류 고건축 및 역사기념건축물
(古建筑及历史纪念建筑物)
시대
일련번호 1-0119-3-072
주소 중화인민공화국 쓰촨성 청두시 우허우구 우허우츠다제 231호
四川省成都市武侯区武侯祠大街231号
등재 1961년
차수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AAAA급
파일:IMG_0011.jpg
한소열묘(漢昭烈廟)[1]
1. 소개2. 특징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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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쓰촨성 청두시 무후사(武侯祠)에 있는 촉한의 초대 황제인 소열황제 유비(昭烈皇帝 劉備)의 능묘(陵墓). 유비의 묘는 혜릉(惠陵)이라고 불린다. 이곳은 유비의 능묘이지만 동시에 그의 신하인 제갈량(諸葛亮)의 사당(무후사)이기도 하며 유비 외에도 관우, 장비 등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촉한의 신하들 역시 같이 기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두보의 고백행이라는 시에도 나오듯이 이미 당나라 이전시기부터 유비의 묘와 제갈량은 같은 사당에 모셔져 있었던 것 같다. 북쪽에 위치한 본당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해 하나의 축을 이루는 구조다.

유비의 무덤은 유비묘(劉備墓)라고도 하며, 청두 무후사의 정전 서쪽에 있다. 223년, 유비가 백제성에서 붕어한 뒤, 제갈량은 유비의 시신을 5월에 청두로 옮기고 8월에 혜릉에 매장하였다. 2대 황제이자 아들인 회제 유선은 제갈량의 건의에 따라 유비의 부인이자 자신의 어머니 소열황후 감부인을 합장했고 후일 후비인 목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유골도 합장하였다.

면양에 세워진 무후사는 촉한 당대에 지어졌지만 성도의 무후사는 성한 이웅이 촉한이 망한 지 50여 년 만에 무후사를 만들고, 지금의 장소에 옮겼다. 이민족 정권인 성한 정권 입장에선 사천 주민들의 추앙을 받는 제갈량의 위상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5세기 이후에는 유비와 제갈량 두 사람이 각각 명군과 충신의 본보기로 합사된 것이 확인되고, 적어도 명나라 홍무제의 아들 촉헌왕 주춘이 제사를 지낸 것이 확인되니 그 연원이 오래되었다.

이후에도 두보를 비롯한 많은 명사들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현재 남은 옛날 건축물 상당수는 명나라 말에 난리 때 불에 타 청나라 강희제 때 재조성된 것이고, 성도 무후사 박물관으로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촉한이 망할 때 끝까지 항전을 주장한 유심의 상은 할아버지 유비 옆에 그대로 세워져 있지만 유선의 제위는 나라를 말아먹은 어리석은 군주라고 하여 남송 때 없애버렸다.

유비의 황릉은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 황제가 직접 능을 보수하고 비석까지 세우는 등 극진하게 대우하였다. 황당한 것은 여러 곳에서 자기네 땅에 유비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유비의 묘가 성도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부실하며 다른 곳에 이장됐다는 정식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송나라 초 지리서인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72에 따르면 그의 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익주 성도현에 있어 동릉(東陵)이라고 하니, 바로 유비의 능이라 하였고 사당이 있어, 동릉신(東陵神)이라 했다.

2. 특징

무후사에 들어서면 사당과 사당을 연결하는 산책로엔 푸른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무후사 정문에 들어가 "무후사(武侯祠)"라는 편액이 걸린문을 들어서면, 앞에 있는 전당(殿堂)의 복도가 문신무장랑(文臣武將廊)이다. 좌우로 촉한(蜀漢)시대 유명한 문관(文官)과 무장(武将)들의 흙으로 빚은 상이 자리잡고 있다. 한소열사당 내부에는 촉한의 역사적 인물들을 상징하는 토우가 41점에 달한다. 토우들은 청대(淸代)의 조각가들이 만들었으며 촉한의 군신서열에 따라 배치돼 있다. 사당 왼쪽에는 무신, 오른쪽이 문신들이다.

본당 아래에는 따먼(大門, 대문), 얼먼(二門, 이문), 유비전, 과청, 제갈량전오중(諸葛亮殿五重)이 있다. 서쪽에는 유비의 묘 혜릉(惠陵)이 있으며, 얼먼에서 유비전과 동서전(東西殿), 과청에서 제갈량전(諸葛亮殿)의 동서방향으로 각각 두 개의 곁방이 붙어있는 구조로 형성돼 있다. 이밖에 탕뻬이(唐碑, 당비)는 사당 내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로 이 비석에는 제갈량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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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출사표 악비의 글
특히 이곳에는 제갈량이 출정할 때 후주에게 올린 전 출사표와 후출사표를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가 송고종 소흥 8년(1138)에 옮겨 쓴 글이 벽에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촉한의 명신 제갈량과 송대의 충신 악비의 정신이 결합된 것으로 서예적, 문학적 가치는 물론 충절의 귀감이 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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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의 상[2] 유비 사당의 상[3] 관우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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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상이 모셔져 있는 사당의 현판인 '명수우주', 현판에 새겨진 명수우주는 '이름이 온 천하에 울린다.'라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가 무후사에 들러 제갈량을 기리며 쓴 시의 한 구절이다. 제갈량 상 양옆에는 왼쪽엔 아들 제갈첨, 오른쪽엔 손자 제갈상이 모셔져 있다.

제갈량의 무후사가 정전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유비보다 제갈량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다.[4] 단적으로 무후사 안쪽 바위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고 한다.
문 앞에는 크게 한소열묘라고 적혀있으나, 사람들은 모두 무후사라 불렀다. 명예와 지위가 모두 훈업에게 패한 것으로 승상의 공이 더 높아 백 대 동안 간직될 것이다.[5]
파일:IMG_0085.jpg
유비의 혜릉
원추형의 능묘는 높이 12m, 둘레 180m로 작은 구렁처럼 보이고, 수목이 울창하고 잔디가 푸르러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짙다. 능묘는 가림벽과 난간문, 묘지로 향하는 길, 침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림벽은 길이 10m, 높이 5m이며, 한가운데 마름모꼴의 석각이 새겨져 있다. 위쪽에는 구슬을 희롱하는 한 쌍의 용이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박쥐가 새겨져 있다. 난간문은 너비 12m, 안길이 7m이며, 3칸의 한가운데 '한소열릉(漢昭烈陵)'이라고 적힌 현판이 높이 걸려 있다.

침전은 정면의 너비 11m, 안길이는 8m이며, 대기(臺基) 위에 축조되어 있다. 좌우의 벽에는 3개의 비석이 있다. 침전의 한가운데는 명(明)나라 때 주조된 쇠가마 1개가 있다. 쇠가마는 입구 지름 77㎝, 높이 124㎝이며, 발이 3개 달려 있고 조형이 고풍스럽다. 침전 뒤편에는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인 1668년에 축조된 궐방(闕坊)이 있다. 궐방의 한가운데에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이라고 새겨진 아치형의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지붕돌에는 보물을 다투는 한 쌍의 용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궐방 뒤편에 유비의 묘가 있다. 유비의 묘 혜릉은 높이 12m, 둘레 180m로 감(甘)부인과 오(吳)부인이 같이 묻혀 있다. 무후사 뒤편에는 유관장 삼형제를 기리는 삼의묘가 있고, 이들이 도원결의를 맺은 복숭아 정원을 재현한 정원도 있다.

3. 기타

당나라 시기 이야기책인 유양잡조(酉陽雜俎)에서 이르길 당시에 유비의 묘를 도굴한 자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등잔을 내밀어 바둑을 두고 있었고, 시위(侍衛) 10여 명이 보여, 도둑은 놀라 두려워 절하며 잘못을 빌었다. 한 사람이 돌아보며 이르길: "그대도 마시고 싶은가?" 이에 각자 한 잔을 마셨고, 더불어 옥으로 된 요대 수 조(條)를 구걸하니, 각자 이를 묶어 주며 돌려보냈다. 도둑이 밖에 나오니, 입은 이미 옻칠돼 있었고, 요대는 바로 거대한 뱀이었다. 그 굴을 보니, 이미 평평해져 다시 이전과 같았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외에 유비릉의 풀을 뜯어먹은 양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던지, 유비릉 위에 난 나무가지를 꺾은 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팔이 기형으로 태어났다던지 하는 괴담들이 전해진다.

명나라 건국공신 유기에 대한 전설도 있다. 해당 문서 참조.

무후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금리거리는 촉나라 당시 시장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진리(錦里·금리)거리는 무후사와 맞닿아 있는데 당시 촉나라 시장을 재현해 놓았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인사동길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차를 파는 가게와 각종 기념품 가게 등이 골목길을 따라 이어져 있고 입구를 지나치면 스타벅스도 있어 말만 과거지 내용물은 현대다. 수많은 인파와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점, 술집과 찻집, 갖가지 먹을거리를 맛볼 수 있는 노점들의 모습이 인사동과 너무나 닮았다. 바닥에 비춰지는 안내 조명과 처마 밑에 매달린 수많은 등불들이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곳 안내원은 밤이 깊어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 오고, 사람들은 그렇게 이곳에서 삼국지와 삼국지 인물을 주제로 추억을 만든다고 얘기한다. 또한 운이 좋은 날에는 무료로 길거리에서 변검 공연을 하기도 한다.

삼국시대를 연 조조, 유비, 손권 이 세 명의 군웅들 가운데 유비는 유일하게 현대까지 확실하게 무덤의 소재지가 밝혀져 남은 사람이기도 하다. 조조와 손권의 묘는 그 행적이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도 불분명하다. 라이벌 조조는 중국 당국에서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곳이 있긴 하지만 정말 조조의 무덤이 맞는지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다.[6] 손권묘는 명나라 홍무제의 황릉 묘지기 신세(...)가 되었다고는 하는데 사실관계가 확실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홍무제의 능인 명효릉에는 손권 기념관은 있는데 정작 손권묘가 없다. 명효릉의 근처에도 없다. 메이화산(梅花山)이라는 산이 근처에 있는데 손권이 그저 이 산에 묻혀있다는 것. 어쨌거나 손권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곳에는 손권의 동상도 있다. 이런 차이는 유비가 해당 지역민들인 사천 지방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고, 역대 왕조들도 촉한을 정통으로 보아 그 묘소를 대대로 잘 돌보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현재 유비의 60대(!) 후손이 여기서 짚신을 팔며 생활하고 있다. 일설에는 관리자고 짚신을 만들어 파는 건 관광객들을 위한 마케팅이라는 말도 존재한다. 능 관리자설이 사실이면 유비의 후손이 선조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는 의미다.[7] 선조가 유비의 둘째 아들 유영이라고 한다. 항렬로 따지면 전한 경제의 78대손, 중산정왕 유승의 77대 후손이며 유정의 76대손이 된다.[8]

과거 쓰촨 일대에 지진이 났을 때 사람들이 '승상께서 어떻게든 해주실 거다'라고 믿으며 이곳에 피난을 왔는데 신기하게도 이곳만이 지진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막상 쓰촨성 대지진 때는 이곳도 경미하게나마 피해를 입었다. #


[1] 여기 사진에 나온 현판들은 모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 나온 '廟'자는 무덤 묘가 아니라 사당 묘자이며, 조상이나 여러 훌륭한 성인의 신주·영정 등을 모신 사당이란 뜻으로 종묘사직할 때 붙이는 바로 그 글자다. 해석하면 '한소열제의 사당, 묘당(廟堂)'이라는 뜻. [2] 성관금석(정성을 쏟으면 쇠와 돌도 뚫는다)이라 쓰인 현판 밑에 모셔져 있다. [3] 대업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업소고광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4] 사실 유비가 촉을 통치한 기간은 6~7년 가량이지만 제갈량은 촉의 재상으로 10년 넘게 통치하며 존경을 받았던 점이 주된 이유로 보인다. 물론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거의 진주인공급으로 각색된 점도 이런 숭배의 원인 중 하나일듯. [5] 무후사, 그 안에서 본 삼국지(신아사, 2017) 32쪽. [6] 조조의 무덤이 불분명한 이유는 조조가 생전에 워낙 적이 많았고 남의 무덤까지 대놓고 도굴하다보니(발구중랑장이라는 남의 무덤을 전문적으로 도굴해서 골수까지 다 팔아치우는 상식을 뒤집어버리는 기괴한 직책까지 만들었다) 자신의 가짜 무덤을 여럿 만들고 자기 진짜 무덤은 철저히 숨긴 데다가 무덤에 관한 기록과 발견된 무덤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중국 정부는 귀차니즘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여러 논란에도 조조의 무덤이라고 그냥 얼버무린다. [7] 사실 유씨 자체가 오늘날 중국 기준으로도 그렇게 드문 성씨는 아니기도 하다. 박혁거세 경주 오릉 관리자가 박씨라고 해도 박씨가 한국에서 흔한 성씨니까 신기한 일이 아닌 것처럼.. [8] 유선의 자손은 영가의 난 당시 대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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