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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22:55:09

마이크 나우멘코

주파르크에서 넘어옴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주파르크 결성 이전2.3. 주파르크 결성 이후2.4. 사망
2.4.1. 불운의 단명사
3. 음악4. 기타5. 디스코그래피6.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파일:majk_naumenko_lv.jpg
[1]

1970년대 중후반부터 1991까지 활동한 소련의 유명 락 음악가. 풀네임은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나우멘코(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Науменко)로, '마이크(Майк)'는 별명이자 예명이다.[2] 1981년 락밴드 '주파르크(Зоопарк)[3]'를 결성해 사망할 때까지 보컬, 리드 기타 및 작곡가로 활동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5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축 공학 학교[4]의 교사였던 바실리 그리고로비치 나우멘코(Василий Григорьевич, 1918-2007)와 사서였던 갈리라 플로렌티예바 나우멘코-브리티감(Галина Флорентьевна Науменко-Брайтигам, 1922-2010) 사이에서 태어났다.[5] 어릴 적 비틀즈, 척 베리, 밥 딜런, 루 리드, 마크 볼란, 데이비드 보위 등 당시 영미권 쪽 음악을 많이 접했고, 이는 이후 마이크의 음악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자신의 할머니가 사 준 기타를 통해 음악을 시작했고, 초기에는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작곡했다고 한다.[6] 자신의 누나 타티야나 나우멘코(Татьяна Науменко)에게서도 음악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불확실하다.

2.2. 주파르크 결성 이전

특수 학교 졸업 이후 아버지의 제안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축 공학 학교에 들어갔지만 4학년 즈음에 자퇴했다. 자퇴 후에는 볼쇼이 인형 극장(Большой театр кукол)에서 사운드 엔지니어로 일했으며, 경비원으로도 일했다.[7]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음악 활동은 계속했으며, 무명 시절에는 레닌그라드의 여러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했다.[8]

1977년부터 1979년 사이 당시 러시아의 유명 락 밴드였던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에서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는데, 이 때 아크바리움의 리더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Борис Гребенщиков)의 도움으로 1978년 자신의 첫 앨범인 '모든 형제들은 자매들이다(Все братья — сёстры)'을 녹음했다.[9] 이 앨범은 기타와 하모니카만 가지고 네바 강의 제방에서 마약-202[10]로 녹음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이후 1979년 가을 이후 솔로 음악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0년 7-8월 사이에는 볼쇼이 인형 극장에서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와 음악가 뱌체슬라프 조린(Вячеслав Зорин)의 도움으로 앨범 '사랑스러운 N과 그 외(Сладкая N и другие)'을 녹음했다.[11] 곡은 총 32개를 녹음했지만 이 중 앨범에 실린 것은 15개였고, 나머지 17곡은 마이크 사후인 2001년 앨범 재발매 과정에서 공개되었다. 앨범은 당시 모스크바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마이크는 '레닌그라드의 밥 딜런(Ленинградский Дила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3. 주파르크 결성 이후

파일:zoopark.jpg
1980년 가을 마이크는 아크바리움 멤버였던 미하일 파인시테인바실리예프(Михаил Файнштейн-Васильев)을 통해 당시 3인조 학생 밴드였던 '잘 있거라, 검은 월요일이여(Прощай, чёрный понедельник)'의 멤버들을 포섭해 밴드 '주파르크'를 결성한다.[12] 이후 연습을 거쳐 1981년 2월 데뷔했으며, 같은 해 봄에 레닌그라드 락 클럽(Ленинградский рок-клуб)[13] 공연 허가를 얻어 5월 콘서트를 가졌다. 반응은 좋았으며, 이후에도 밴드는 '당시 소련에서 가장 많은 콘서트를 연 밴드'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 나갔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키노 등에 밀려 인기가 조금 식기는 했으나, 당시 소련에서는 듣기 힘들었던 영미권 락앤롤 계열 음악을 연주하며 그럭저럭 잘 나가는 편이었다.

1982년에는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 막 들어온 무명 락밴드의 공연에 참여해 이들을 띄워주었는데, 이 밴드가 바로 그 유명한 키노였다. 이 에피소드는 영화 레토에서도 등장했으며[14], 이후에도 마이크는 같이 여러 번 크바르티르닉[15]을 여는 등 빅토르와 키노를 적극적으로 서포트해 주었다.[16][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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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사진(왼쪽) 및 1991년 사진(오른쪽). 확인해 보면 살이 상당히 많이 찐 걸 확인할 수 있다.[19]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마이크는 수많은 악재에 시달렸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비만 등 건강이 악화되었고, 아내와도 사이가 악화되었으며 [20], 왼쪽 손목에 문제가 생겨 기타 연주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런 문제와 함께 밴드 또한 수많은 공연에 따른 피로를 호소했고, 결국 1987년 이후 공연을 차츰 줄여나갔다. 당시 드러머였던 발레리 키릴로프(Валерий Кирилов)[21]의 증언에 따르면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며 가사를 쓰다 찢는 일을 반복했으며, (의외라면 의외로) 상당한 애국자였기에 당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던 소련 붕괴의 징조를 보고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이와 함께 러시아 현지에서는 나우멘코가 말년 빈곤에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사실이다. 인기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주파르크는 지속적으로 투어를 다녔고[22], 멜로디야에서 앨범을 공식적으로 발매하며 저작권료가 들어왔기 때문이다.[23] 당시 나우멘코의 문제는 알코올 중독과 창작력 고갈이었지 돈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2.4. 사망


생전 마지막 공연. 1991년 3월 14일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있었던 제8회 레닌그라드 락 콘서트[24] 당시 모습으로, 영상을 잘 보면 기타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고 목소리도 상당히 엉망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노래 제목은 교외 블루스(Пригородный блюз).
말이 아크바리움과 합작 공연이지 사실상 아크바리움 주연에 꼽사리 낀 수준이다. 지못미

1991년 8월 27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사망하였다.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숨이 붙어 있었는데, 병원에 이송되었을 때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부검 결과 뇌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판정이 났으나, 강도에게 습격을 받았으며 이로 인한 두개골 골절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25]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볼코보 공동묘지(Волковское кладбище)에 안장되었다.

당시 마이크는 새 앨범을 준비하며 재기를 꿈꾸고 있었는데, 그의 사망 이후 밴드는 당시까지 작업한 곡들을 모아 마지막 앨범인 '영화를 위한 음악(Музыка для фильма)'를 낸 후 해체하였다.
2.4.1. 불운의 단명사
희한하게도 레닌그라드 투소프카를 포함한 이 시절의 러시아 락 음악가들은 단명하거나 러시아를 떠나버린 케이스가 꽤 되며, 밴드 또한 해체 및 멤버 교체가 잦은 편이었다. 심지어 이런 사건들 대부분이 소련 붕괴와 온갖 사회적 변화들이 전후로 일어났기에(1980년대 말 - 1990년대) 러시아 락 팬들은 이 시기를 암담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죽은 사람만 해도 이 정도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게 바로 이 영상이다. ДДТ의 'Что нам ветер(우리에게 있어 바람이란 무엇인가)'라는 곡인데, 원곡은 1995년 발표했으나 2010년대 이후부터 라이브용으로 약간 편곡한 뒤 먼저 떠난 동료 음악가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콘서트마다 단골로 연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료들의 사진과 이름, 소속 밴드를 띄워 주는데, 이게 한 두 명이 아니다(...)[45]

3. 음악

그의 음악은 비틀즈, 밥 딜런, T-Rex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문제는 이게 단순히 영향 수준에서 그친 게 아니라 가사나 멜로디 등을 들어보면 표절이라는 말이 나와도 할 말이 없을 수준이다. 한 번 비교해 보자.
주파르크의 '여름(Лето)[46]' 비틀즈의 '비밀을 알고 싶니(Do you want to know a secret)?'
주파르크의 '아침 일찍 나에게 전화해 줘(Позвони мне рано утром)' 밥 딜런의 '아침에 나를 만나 줘(Meet me in the morning)'
주파르크의 '매일매일 부기우기를(Буги Вуги каждый день)'[47] T-Rex의 '나는 부기를 좋아해(I love to boogie)'

사실 마이크 나우멘코처럼 서구 록 음악을 베끼다시피한 창작 방식은 서구권 바깥 국가의 록 음악 초창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일본 록 핫피 엔도 이전까지 얼마나 서구 록 음악을 잘 모사하는가가 척도가 되던 시기가 있었고, 한국도 상황은 비슷했다. 마이크는 그런 초창기적인 현상을 보여주는 뮤지션이다. 다만 이 시기를 넘어서면 얼마나 독자성과 국가적 정서를 담아내느냐가 문제가 되는데 마이크는 그 부분에서 다소 미숙했다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다양한 실험과 러시아 바르드 전통을 접목하려고 했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나 빅토르 초이 같은 음악적 동료들에 비하면 확실히 아쉬운 부분. 덤으로, 당시 소련에서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기었기에[48] 큰 비난을 받지는 않았고, 서구의 음악을 러시아식으로 소화했다는 정도가 당시 대다수의 평이었다.

다만 이를 제외하더라도 냉소와 풍자가 특징인 그의 자작 가사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가사는 보통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어 있는데, 한 인터뷰에서 마이크는 "내 가사 대부분이 1인칭이라 할지라도 그게 나라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때문에 현대 러시아에서는 좀 떨어지긴 해도 레전드 취급은 받는다. 어찌되었든 러시아 록 씬을 견인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

보컬 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은 편이었는데, 마이크 본인도 이를 인지하였기에 노래를 보통 레치타티보 방식으로 불렀다.

4. 기타

5. 디스코그래피

6.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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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러시아-프랑스 영화 레토의 공동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러시아의 락밴드 '즈베리'의 리더 로만 빌릭이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는 마이크-빅토르-나탈리야 간 삼각관계가 있었다는 설정인데, 이는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나탈리야 본인의 주장일 뿐이라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사실 영화 '레토' 자체가 고증에 입각한 일반적인 전기 영화는 아니라 큰 문제까지는 아니다.

작중에서는 팬덤도 꽤 있고 레닌그라드 투소프카[64]를 이끌만한 친화력이 있는 뮤지션이지만 재능 면에서는 빅토르보다는 뭔가 딸리는 콩라인 취급을 받는데, 현대 러시아인들이 마이크 나우멘코라는 뮤지션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레토의 비평 중에서는 빅토르와 마이크를 예수 세례자 요한 구도로 해석하는 평이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는 마이크를 세례자 요한에 속하는 캐릭터로 본다. 그래도 성격 자체는 좋은 대인배로 묘사된다.


[1] 이 사진은 주파르크의 1982년 앨범 'LV'에서도 사용되었다. [2] 아내 나탈리야 나우멘코의 증언에 따르면 학교 교사한테서 받은 이름이라고 한다. 마이클(Michael)의 애칭인 마이크(Mike) 맞다. [3] 러시아어로 '동물원' [4] 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архитектурно-строитель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СПбГАСУ) [5] 빅토르 초이처럼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6] 영미권 음악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최초로 러시아어 가사를 쓴 것은 한참 뒤인 1972년의 일이며, 이는 선배 음악가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7] 당시 소련에서 직업이 없는 백수는 처벌 대상이었으며,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는) 밴드나 가수는 직업으로 인정되지 않았기에 마이크는 계속해서 여러 일을 해야 했다. [8] 동료 음악가인 빅토르 초이 또한 무명 시절에는 여러 밴드에서 베이스를 맡았다. [9] 정확히 말해 단독 앨범은 아니고, 전체 곡의 반은 그레벤시코프의 곡이다. 그레벤시코프의 딸인 알리사가 1978년 6월 12일에 태어났는데, 그레벤시코프는 딸이 태어난 기념으로 이 앨범을 제작했다고 한다. [10] Маяк-202. 당시 소련의 카세트 테이프 녹음기. 혼동을 위해 첨부하자면, 여기의 "마약"은 러시아어로 등대를 의미하며 상표명이다. 헤로인이나 코카인 같은 마약은 나르코틱(наркотик)이라고 한다. [11] 이 '사랑스러운 N'의 정체는 나우멘코의 아내인 나탈리야 나우멘코(Наталья Науменко)가 아니다. 후술. [12] 이 밴드는 마이크의 음악적 성향과 상당히 다른 하드 락이나 헤비 메탈을 연주하던 밴드였으나, 상호 간의 이해를 통해 음악적 취향으로 인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13] 당시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락 공연이 가능했던 극장. 루빈슈타인 거리 10번지 위치. 다만 규제나 규칙이 좀 빡셌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4] 당시 실황. 음성밖에 남아 있지 않다. 곡은 키노의 '당신도 한때는 비트닉이었잖아요(Когда-то ты был битником)'. 2분 15초 경에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일렉 기타가 마이크의 연주다. 이 외에도 해당 콘서트 시작 전에는 직접 무대에 나와 키노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15] 소규모 홈 콘서트. 아파트(квартира) 방에서 한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소련답다면 소련답게 불법이었고, 단속에 걸릴 경우 정말 재수가 없으면 주최자는 몇 달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16] 다만 1986년 이후 서로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명시적인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유명세나 인지도, 음악적 활동 등에서 초이와 나우멘코는 그 차이가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우멘코는 여전히 정통 미국식 락앤롤을 연주했으며 그 스타일이 크게 바뀌지 않았기에 점차 인기가 떨어져 가고 있었다. 반면 초이는 "혈액형" 앨범을 기점으로 스타일에 큰 변화를 이루었고 지속적으로 인기가 오르고 있었다. [17] 초이 사망 직후인 1990년 9월 나우멘코는 한 인터뷰에서 볼고그라드에서 초이를 보았는데 자신에게 인사도 해 주지 않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고, 라시드 누그마로프 또한 1990년 둘의 마지막 만남을 직접 목격하였을 때 둘의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못했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한 적 있다. [18] 당시 레닌그라드의 음악가들과 친분이 있었던 언론인 아르테미 트로이츠키는 # 왜 초이가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나우멘코를 도와주지 않았냐는 팬들의 질문에 대해 나우멘코의 자존심 문제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19]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알코올 중독 및 비만 상태가 악화될 무렵부터 마이크는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사진을 찍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후반부 사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20] 결국 아내 나탈리야와 별거에 들어갔다. 이혼은 마이크의 사망 2주일 전인 1991년 8월 15일. 아이러니하게도 1년 전인 1990년 8월 15일은 동료 음악가 빅토르 초이가 라트비아에서 차량 사고로 사망한 날이었다. 나탈리야는 아직도 살아있으며 영화 '레토'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1] 이 사람은 1983년경 잠시 키노의 드러머를 맡은 적도 있다. [22] 80년대 레닌그라드의 유명 극장이었던 렌소베트에서 가장 많이 공연을 하고 가장 많이 돈을 받아가던 밴드가 주파르크였다. [23] 물론 데데테나 마스테르, 키노,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 등의 사례에서 보이듯 당시 멜로디야가 저작권 침해와 음악가들의 페이를 후려치는 걸로 악명 높긴 했으나 나우멘코 정도 되는 유명 가수는 그래도 어느 정도 돈을 받을 수 있었다. [24] фестивал в «Юбилейном», Ленинград Рок-клуб 1991 г. [25] 그 근거로는 당시 마이크의 집이 어지럽혀져 있었고 또 없어진 물건이 있었다는 점과 어느 10대의 증언 등이 꼽힌다. 물론 어디까지나 '썰'이며 공식 인정은 못 받고 있다. 다만 주파르크의 드러머였던 발레리 키릴로프와 마이크의 아들 예브게니 나우멘코는 타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26] 보컬 + 작사작곡 + 기타. [27] 차를 몰고 가던 중 버스와 충돌해 즉사했다. 그의 영향력을 위험하게 본 KGB가 사고를 가장한 암살로 쓱싹했다는 설이 있지만 현재는 단순히 과속으로 인한 사고라는 의견이 정설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초이는 과속을 즐기는 위험천만한 운전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28] '스빈'은 러시아어로 '돼지'를 의미. [29] 마취제 종류에 알레르기가 있었던 걸로 추정되는데 수술 당시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파노프의 모친인 리야 페트로노바는 의사들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며 비난했다. [30] 같이 동료로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자신의 밴드에 빅토르를 넣어주기도 했기에, 카메오 식으로 넣어준 듯하다. [31] 러시아 음유 시가에 영향을 받아 시 낭송에 가까운 포크 음악을 했으며, 러시아에서는 상당히 높이 평가 받는 인물이지만 가사가 현지인들이 해석하기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해외에서는 별로 알려져있지 않다. 정규 레코딩을 하지 않았지만 개인 녹음본 복각본이 나와있다. 27세 클럽에 속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32] 러시아어로 '러시아 사람들' [33] 그 여파로 결국 밴드는 해체되었다. 이후 그를 보았다는 몇몇 사람들의 증언이 있었지만, 결국 20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법원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 [34]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 연애적 관계는 없었다고 함. [35] Дача, 소련 시절 전 국민들에게 불하된 일종의 별장. [36] 확인되지 않은 풍문에 따르면 그녀의 머리가 깨져 있었으며 폐에 물이 차지 않았다(=익사하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이 설에 대해 예고르 레토프는 (그 설이 맞다면) 그녀가 고프닉(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어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발언한 바 있다. [37] 이고리가 본명, 예고르는 예명. 러시아어 강세에 따르면 '예고르' 또한 실제로는 '이고르'로 발음되는데, 본명과 에명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보통 '예고르 레토프'라고 표기한다. [38] 이 인간의 디스코그래피를 보면 '좆(Хуй)'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노래 제목이 무려 4개에 달하며(심지어 가사 내용도 '좆이나 빨아라' 딱 이런 노래다), 1987년 앨범 제목은 대놓고 ' 시체성애자(Некрофилия)'이다. [39] '고르쇽'은 러시아어로 병, 요강, 단지 등을 의미 [40] 러시아어로 '센터(중심)'. 활동 당시 기행이 많았던 밴드였는데, '우리 밴드에서 연주하기엔 너무 잘한다'는 말과 함께 기타리스트를 해고했다던가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에드가 앨런 포 같은 서구권 시인들과 조이 디비전를 흠모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다만 이 때문인지 러시아 내 인기는 열광적 컬트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러시아 내에서도 정보가 의외로 빈약한 편. [41]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가 같은 날을 의미하는 단어 [42] 덤으로 당시 바이올린을 담당하던 멤버 또한 단명하였다. [43] 당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는 가능한 한 노래나 평소 발언에서 노골적인 정치적 색채를 투과시키지 않으려 했으며, '자유와 변화를 외친 투사' 정도의 이미지가 있는 빅토르 초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44] 평단에서는 이들을 언급할 때 조이 디비전이나 토킹 헤즈 등을 같이 언급할 정도다. [45] 참고로 이 영상은 2019년 2월 버전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이 슬금슬금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의 열광 정도로 보아 이들의 유명세를 짐작할 수 있다. 빅토르, 마이크, 바실라초프, 호이, 고르쇽, 예고르 등의 반응이 큰 편 [46] 빅토르 초이에게 헌정한 곡 [47] 혹은 '나는 부기우기를 좋아해(Я люблю буги-вуги)' 아예 제목까지 그대로 가지고 왔다 [48] 대표적인 게 키노의 '밤(Ночь)' 사건. 당시 키노는 '밤' 앨범을 작업하다 10곡 정도 녹음하고는 프로젝트를 폐기했는데, 프로듀서가 이를 당시 소련 유일의 국영 음반사였던 멜로디야에 넘겼다. 멜로디야 측은 이걸 20만부나 팔았지만, 키노 측은 1코페이카도 못 받았다. [49] 한국의 '특목고'와 비슷한 개념의 학교 [50] 아직까지 출간되지 않은 나머지 책들은 서구 음악에 관한 번역서라고 한다. [51] 당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는 가능한 한 노래나 평소 발언에서 노골적인 정치적 색채를 투과시키지 않으려 했으며, '자유와 변화를 외친 투사' 정도의 이미지가 있는 빅토르 초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초이는 인터뷰에서부터 누누히 '자신은 정치적 발언을 떠드는 부류가 아니다'고 밝힌 적이 많다. 음악 성향 또한 당시 레닌그라드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일렉 쪽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단에서 조이 디비전이나 토킹 헤즈 등을 언급할 정도로. 참고로 보르지킨은 지금도 푸틴과 극우파 무리를 비판할 정도로 강한 정치색을 유지하고 있다. 그 예로, 2010년에는 자신들의 곡인 '니 애비는 파시스트 새끼다(Твой папа - фашист)'를 헌정했는데 제목에서 감이 오듯 가사가 딱 푸틴을 욕하는 내용이다. 다만 곡 자체는 푸틴 집권 전에 만들었다. [52]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와 합작한 앨범. [53] 당시 32곡을 녹음했지만 그 중 15개만 수록되었다. 나머지 17개는 2001년 앨범을 재발매하면서 공개되었으며, 이 외에도 약 10곡 정도가 재판에 추가되었다. 이 앨범은 마이크의 영어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앨범이다. 재미있게도 이 'N'은 부클릿 기준으로 키릴 문자가 아닌 라틴 문자로 쓰는 게 맞는 표기인데, 정작 마지막 앨범인 '영화를 위한 음악'의 부클릿에는 키릴 문자 Н가 적혀 있다. [54] 라이브 앨범. [55] 정확히 말해서 LV 앨범은 1982년 녹음곡들과 그걸 다시 녹음한 1986년 녹음본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LV'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썰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썰이 나우멘코가 태어난 해 '55'를 가리킨다는 썰. 로마 숫자로 L이 50, V가 5이므로 LV는 55를 의미한다. [56] 1983-1984년 어쿠스틱 라이브 콘서트 모음. [57] 보리스, 마이크, 빅토르의 라이브 앨범. 공식적으로는 보리스/아크바리움의 디스코그래피에 들어간다. [58] 제1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 실황 및 리허설을 담은 라이브 앨범. [59] 러시아 문학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인 동명의 도시 이름에서 따왔다. [60] 초판은 14개, 재판은 21개 트랙이 실려 있다 [61] 마이크의 유작. 재판에는 마이크와 관련된 인터뷰들이 실려있다. [62] 녹음은 1987년경에 했지만 앨범은 2000년에 발매되었다. [63] 제4회 및 제5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 실황 녹음. 2000년 발매. [64] 투소프카(тусовка)는 '반문화(反文化)'를 의미하는 당시의 속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