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크랩 John Crab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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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1352년 | |
출생지 | 플란데런 백국 무이덴[1]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 |
직위 | 잉글랜드 해군 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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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란데런 출신의 군인. 초기엔 해적으로 활동했고, 이후엔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하려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도와줬다. 1332년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힌 뒤 잉글랜드 편으로 돌아서서 백년전쟁 시기 에드워드 3세의 충실한 부하로서 해상에서 활약했다.2. 생애
플란데런 백국의 작은 마을인 무이덴 출신이다. 이 마을은 브뤼헤, 담, 슬로이스를 연결하는 즈빈 강 하구 인근 해안에 위치했다. 존 크랩은 모종의 시기에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3세의 부관이 되었다. 1305년 비스케이 만의 라 로셸에 정박하고 있던 도르드레흐트에 정박하고 있던 선박 '바르데부레(Waardeboure)'를 습격해 160톤의 와인이 포함된 화물을 탈취하여 배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납치했다. 당시 도르드레흐트는 에노 백작 요한 2세 폰 아베네스의 관할로, 에노 백국과 첨예한 상업 갈등을 벌이고 있던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3세가 이 해상 습격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도르드레흐트 상인이며 바르데부레 선 소유자였던 요한 드 바르드레가 2,000 리브르 투르투아의 손해 배상을 요구했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필리프 4세는 파리 법정에서 심판하기로 했지만, 4년이 지나도 존 크랩과 부하들이 재판을 받으러 오지 않자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요한 드 바르드레는 끝내 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했다.
1310년 5월, 에노 백작 요한 2세 폰 아베네스의 딸이자 제5대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의 아내였던 에노의 앨리스의 소유였던 천, 보석, 금, 은 및 £2000 상당의 기타 상품을 운반하는 배가 런던으로 향하던 중 도버 해협에 정박하고 있을 때 습격해 약탈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는 5월 29일 로베르 3세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존 크랩을 체포해 잉글랜드로 소환에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1315년 존 크랩의 부하 일부가 처벌을 받은 걸 빼면 별다른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고, 존 크랩은 끝내 재판을 받지 않았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앨리스에게 보상하기 위해 런던에서 플란데런 선박과 물품을 압류하라고 명령했다.
이 무렵, 스코틀랜드 애버딘에 있던 존 크랩은 애버딘에서 내륙으로 5마일 떨어진 크로마 영지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1311년 뉴캐슬온어픈에서 89개의 양모 자루를 싣고 저지대 국가로 향하던 잉글랜드 상선 2척을 나포했고, 친구들에게 이걸 맡겨서 플란데런으로 가서 판매해 큰 수익을 챙겼다. 이에 잉글랜드 상인들은 에드워드 2세에게 불만을 토로했고, 에드워드 2세는 로베르 3세에게 배상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1316년 플란데런이 기근으로 황폐화되자, 로베르 3세는 그를 귀환시킨 뒤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기근을 완화하기 위해 잉글랜드 상선들을 털어서 식량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지시에 따라 그레이트 야머스의 상인이 소유한 2척의 배를 탈취했고, 그해 12월 새닛 섬에서 보나 나비스 선을 나포했다. 보나 나비스 선은 보르도엣서 잉글랜드 시장을 겨냥한 귀중한 와인 화물을 운반하던 중이었다. 에드워드 2세는 또다시 로베르 3세에게 항의했지만, 로베르 3세는 1317년 11월 14일 답신에서 로베르 3세가 살인 혐의로 추방되었으며 현재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발뺌했다. 그러면서 만약 잡힌다면 처형 바퀴에 집어넣고 처형하겠다고 덧붙였다.
그후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존 크랩은 베릭 성에 정착했고, 거기서 잉글랜드 선박에 대한 공격을 지속했다. 1318~1319년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세력이 집결한 베릭 성을 점령하려고 시도했을 때, 존 크랩은 수비대를 몸소 진두 지휘해 잉글랜드군을 격퇴했다. 1332년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잉글랜드 귀족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는 10척의 플란데런 선박들을 지휘해 이에 맞섰지만 테이 만 해전에서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던 잉글랜드 함대에게 격파된 뒤 베릭 성으로 피신했지만 얼마 안가 잉글랜드 장성 월터 매니에게 생포되었다.
이후 요크에서 소집된 잉글랜드 의회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보나 나비스 선을 털어먹은 것에 대한 배상을 겸해 4,300 마르크를 책정하고, 그가 석방될 때까지 쇠사슬에 묶어두라고 명령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존 크랩을 자신에게 넘기는 대가로 월터 매니에게 1,000마르크를 지불했다. 1333년 봄, 잉글랜드군이 베릭을 포위했을 때, 존 크랩은 에드워드 3세를 도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스코틀랜드인들은 그의 몸값을 지불하길 거부하고 존 크랩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을 살해했다. 에드워드 3세는 나중에 존 크랩이 베릭 성 공략에 큰 공을 세운 것을 보상하고자 저질렀던 모든 범죄를 용서하고 서머턴 성주에 선임했다.
1335년 2월과 3월에 10척의 함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 원정에 착수한 에드워드 3세의 군대에 식량을 공급했고, 베릭 요새의 수비력 강화에 힘을 보탰으며, 1338년 던버 성 공방전에 참여해 공성무기와 전쟁 물자를 제공했다. 그는 이 시기에 '왕의 요먼'으로 언급되었으며, 한 번은 '왕의 하사'로 언급되었다. 1339년 4월부터 8월까지 제2대 몰리 남작 로버트 몰리의 지휘하에 템즈 북쪽 함대에 배속되어 한 번은 궁수 100명을 지휘했고, 또 한 번은 맨앳암즈 8명, 궁수 70명, 선원 70명을 지휘했다.
1340년 6월 초, 에드워드 3세는 플란데런 백국의 주요 항구인 슬로이스에 프랑스 전함 213척과 2만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해 잉글랜드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그는 이들이 잉글랜드로 쳐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선제공격을 가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잉글랜드 총리인 존 드 스트랫퍼드를 포함한 최고 고문들을 소환한 뒤 당장 동원 가능한 40척을 이끌고 가능한 한 빨리 출항하겠다고 선언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40척만 이끌고 213척을 상대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에 경악해 왕에게 그런 자살 행위는 하지 말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왕이 고집을 꺾지 않자, 캔터베리 대주교는 잔뜩 흥분한 나머지 뛰쳐나갔고, 얼마 후 "강인하고 강력한 군주와 논쟁을 벌이기에는 너무 늙었다"라며 총리직을 사임했다. 에드워드는 다음으로 제독 로버트 몰리와 몰리의 부관인 존 크랩을 불러 자신과 함께 출항하자고 권유했지만, 두 사람 모두 캔터베리 대주교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격분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집에 있어도 좋다! 나는 죽더라도 바다로 떠나겠다!"
하지만 두 제독이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지금 당장 바다를 건너기엔 풍향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지적해가며 설득하자, 왕은 곧 진정되었다. 그는 잉글랜드 전역에 프랑스 대함대가 조국을 침공하기 위해 슬로이스 항구에 집결했다는 사실을 공표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함을 모집하니 조속히 모일 것이며,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필리프와 내통한 반역자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프랑스에 대한 오랜 적개심과 조국을 지키겠다는 애국심, 에드워드 왕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등에 휩싸인 상인들이 앞다퉈 응하면서, 오웰호에 수많은 배가 빠른 시일에 집결했다. 얼마나 많은 선박이 모였는지는 기록이 분명하지 않기에 확실하지 않으나, 학자들은 연대기들의 기록에 근거해 120~150척 정도였을 거라 추정한다. 함대에 탑승할 이들은 백작 10명, 기수 50명, 기사 600명, 전투병을 포함한 선원 12,000명이었다. 이중 7,000명은 장궁병이었다.
이후 1340년 6월 23일에 벌어진 슬로이스 해전에서, 존 크랩은 아군의 대승에 일조했고 도주하는 프랑스 선박 몇 척을 추격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가 플란데런에 상륙한 뒤 투르네 공방전을 감행할 때 따라갔다. 1341년 10월 10일,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에드워드 3세는 존 크랩에게 서머턴 성의 관리권과 수입을 부여하는 대가로 1333년부터 존 크랩에게 지급하던 연금을 취소했다. 그해 12월, 존 크랩은 노팅엄셔에서 자금을 모아 국고를 채웠다. 1346년 10월 17일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에 완패한 후, 에드워드 3세는 왕국 전역의 여러 성에 스코틀랜드 고위 귀족들을 배치했다. 존 크랩은 이와 관련해 1347년 8월 20일 의회에 소환된 인사들 중 한 명이었으며, 그때까지 런던 탑에 투옥되었던 월터 드 마운드빌을 넘겨받았다. 1352년 초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