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1919년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전라남도 제주도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시작하여 4차에 걸쳐 일어난 독립운동. 법정사항일운동, 제주해녀항일운동과 함께 제주의 3대 독립운동 으로 불린다.2. 조천 만세운동
1919년 3월 16일 당시 서울 휘문고보 학생이었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 구체화되었다. 김장환은 숙부 김시범에게 3·1운동의 상황을 이야기 하였으며 이를 들은 김시범은 제주에서의 만세운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김시범은 김시은·김장환과 함께 제주의 유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만세운동을 방의·동지를 규합하였으며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2.1. 1차 만세운동
3월 21일 아침 조천리 미밋동산에 김시범·김시은·고재륜·김형범·김연배·황진식·김용찬·백응선·김장환· 박두규·이문천·김희수·김경희·김필원 등의 14인 동지와 김순탁·김시희·김백능·부병각·김종호·한석영·한석화·심동인·한백흥 등 모두 23인의 거사동지, 그리고 조천리 주민과 인근 함덕·신촌·신흥 등지의 서당 생도 등 약 150여명이 모였다.김필원의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조천지서 서쪽에서 미밋동산을 향해 행진하는 것을 본 주민 500여명이 동참하였다. 오후 3시경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고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김장환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조천 비석거리를 지나 제주 성내까지 행진키로 하였으나 신촌리에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다. 이 충돌로 3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김시범과 김시은 등 13인이 체포되었다.
2.2. 2차 만세운동
3월 22일에는 조천리 장터에서 백은선· 박두규 등의 지도로 약 200여명이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신촌리를 향하여 행진하였으나, 출동한 경찰에 의해 박두규와 김필원 등이 연행되면서 해산하게 되었다.2.3. 3차 만세운동
3월 23일에는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김연배·이문천의 주도로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3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위에서 이문천은 약100여명을 이끌고 함덕리로 행진을 하였으며 시위대가 함덕리에 이르자 약 800여명으로 늘어나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이 3차 만세동산으로 이문천과 백응선 등 8명이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다.2.4. 4차 만세운동
4차 만세운동은 3월 24일 조천의 오일장 날을 기하여 일어났다. 이날은 김연배를 중심으로 약 1천5백여명이 시위에 가담하여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에는 장을 보러 나온 부녀자들도 상당수가 합세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김연배 등 시위를 주도하던 4인이 체포되면서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3. 의의
조천만세운동은 함덕·신촌·신흥 등 인근 지역뿐 아니라 서귀포 등지로도 확산되었고 이후 제주지역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민족해방운동이 모태가 되어 항일운동의 일선에 나선 제주인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되었다.문서 출처: 제주항일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