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요제프 필라테스[1] Joseph Pilat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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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요제프 후버투스 필라테스 Joseph Hubertus Pilates |
출생 | 1883년 12월 9일 |
독일 제국 묀헨글라트바흐 | |
사망 | 1967년 10월 9일 (향년 83세)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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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체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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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체육인. 필라테스를 개발한 인물이다.2. 생애
1883년 12월 9일 독일 제국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태어났다. 체조선수였던 그의 그리스인 아버지 프리드리히 필라테스와 전업주부였던 독일인 어머니, 요제프는 이들 부부의 9명의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구루병, 천식, 류머티즘 질환을 앓으며 병약한 몸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건강에 대한 중요성을 느꼈고 다양한 운동을 하였으며, 자연스럽게 인체에 대한 관심으로 요가와 젠 명상 요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운동법을 터득하여 청소년 시절 질병을 극복하고, 스키 선수, 체조 선수, 그리고 프로 권투선수[2]로 활동하기도 하였다.1912년 30세에 영국으로 이주해 요양원 간병인, 권투선수, 헬스 트레이너, 격투기 지도자로 생활하였다. 1913년에는 서커스단 곡예사로 활동하면서 영국을 순회하였는데 1914년 1차대전 당시 교전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간첩으로 오인받아 그는 영국의 맨 섬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수용소의 좁은 공간 안에서 할 수 있는 효율적인 운동법을 개발하였으며 당시 수용자에게 그의 운동법을 가르쳤다. 필라테스의 운동법은 기존의 건강 프로그램을 체계화하였으며 매트에서 할 수 있는 컨디셔닝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당시 치명적인 유행성 바이러스의 감염으로부터 수용자를 지킬 수 있었다. 그 후 필라테스의 운동법이 인정 받아 수용소 환자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으며, 그 곳에서 필라테스는 환자의 불편한 팔, 다리의 재활을 위해 스프링을 장착한 침대 안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고안 하였다. 또한 이 침대는 필라테스의 매트 운동 기구의 기초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캐딜락”이다.
이때 고안한 운동법이 바로 저항 운동이다. 저항을 통한 운동법은 부상 후 재활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후에 유니버셜 리포머가 탄생된 계기가 돠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19년 초 요제프는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함부르크와 베를린의 의사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개발한 운동법을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운동법은 유럽에서 번성했던 과학, 문학, 철학, 예술 분야의 영향안에서 자신이 배웠던 많은 운동 경험[3], 체조 선수였던 아버지와 자연요법 치료사인 어머니의 영향, 독일과 영국에서 다양한 분야의 활동, 세계대전 중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위한 운동지도, 수용소 병원의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한 재활운동 적용 등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고 체계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건강을 위한 대체요법으로 수치료 요법, 압통점 요법, 호흡법 등이 널리 소개되었는데, 이러한 흐름은 명상과 현대무용 뿐만 아니라 요제프의 운동요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요제프는 자신의 운동요법을 위한 운동 기계를 발명했는데 대표적으로 ‘유니버설 리포머’였다. 이 운동 기계는 신체 기능 장애를 개선하고, 부상을 치료하며 체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1920년 초 요제프는 베를린에서 권투 매니저인 아르투르 뷜로와 함께 권투 트레이너로 일했다. 1차 세계대전 후 다시 독일정부는 다시 전쟁을 계획하고 나치당의 ‘돌격부대’와 ‘갈색셔츠단’은 요제프에게 경찰대 훈련을 요청한다. 이에 전쟁을 예감한 요제프는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 이 이민선에서 영원한 동반자인 애나 클라라 제너를 만난다. 그녀는 요제프의 평생 건강한 파트너이자 조력자로서 그의 운동법 개발과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요제프의 형인 프레드 필라테스는 요제프의 초기에 개발한 운동 기계에서 사용하던 무게추를 스프링으로 교체하고 그 당시에 유행하던 조정동닥에서 사용하는 가죽 끈을 추가하려 운동 기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요제프는 이 기계를 ‘유니버설 리포머’라고 명명했고 미국 특허청에 등록했고 이후 25종의 다양한 운동기구를 개발했다.
초기의 자신의 운동요법을 ‘교정운동’이라고 불렀던 요제프는 1945년 자신의 두 번째 저서 ‘조절학을 통한 삶의 복귀(Return to Life through Contrology)’를 통해 자신의 운동법을 ’조절학(Contrology)’이라 천명했고 이후에 대중에 의해 필라테스(Pilates)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요제프와 클라라는 뉴욕 맨해튼 8번가 건물 1층에 스튜디오를 오픈했고, 1929년 가을 ‘유니버셜 스튜디오’이라는 상호를 등록하고 둘이 함께 필라테스 스튜디오를 운영하였다. 이때의 클라라는 요제프의 중요한 파트너로서 운동요법을 발전시키고 교육 방법을 체계화했으며, 요제프의 조절학을 가르치는 데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요제프의 스튜디오 3층에는 뉴욕시티 발레단이 상주해 있었다. 1930년대 당시 뉴욕시는 무용의 메카였고 필라테스는 무용계의 거장인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을 만나 함께 필라테스 운동을 이어갔다. 이는 필라테스와 무용계의 교류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조지 발란신, 마사 그레이엄, 한야 홀름 같은 안무가들 그리고 많은 유명인들과 교류했다.
1934년 그의 첫 저서인 <Your health>에서 필라테스 운동 요법에 대한 설명과 특수 침대와 의자를 이용한 운동은 자세 교정이 가능하기에 꼭 필요한 운동이라는 걸 강조하였다.
필라테스의 운동법이 발표되고 제일 먼저 무용수들이 자주 부상을 입는 허리나 다리의 재활을 위하여 사용하였으며 그 덕분에 무용계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그의 제자 중 상당수가 무용수다.
1950년대 의학계는 조절학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뉴욕대학교, 할렘 댄스시어터, 92번가 Y, 캐서린 던햄 학교 등 뉴욕시 맨해튼 소재 교육기관에서 조절학은 천천히 뿌리를 내렸다. 1960년대 중반에는 현대무용 안무가들이 필라테스 매트를 워밍업 운동으로 추가하였다. 또한 필라테스 운동법은 뉴욕을 나아가 천천히 다른 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제프의 스튜디오는 1967년 화재로 붕괴되었고 요제프는 그 해 10월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화재연기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졌지만, 조카 메리에 의하면 요제프의 흡연으로 인한 폐질환으로 사망했다고도 전해진다.
[1]
국내에선 일반적으로 조셉 필라테스라 불린다.
[2]
그의 스튜디오 제자 중에 한 명은
잭 뎀프시와 경기를 하기도 했다.
[3]
권투, 펜싱, 레슬링, 체조, 요가, 중국의 기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