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공진(公振)·서구(瑞九) |
출생 | 1853년 |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내면 명당동 (현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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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6년 3월 28일 (향년 73세) |
경상북도 청송군 | |
본관 | 함안 조씨[2]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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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조성규(趙誠奎)는 1853년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내면 명당동(현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에서 아버지 조성묵(趙性默)과 어머니 경주 손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청송향교의 향원(鄕員)으로 활동하던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召募將)인 유시연이 청송에서 무기를 모집하고 다른 지방에서 의병진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왜적을 토벌하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는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는데 조성규는 이때 직임록(職任錄)을 작성하는 등 의진 편성에 참여하였다.
이어 심성지 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그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 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 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의진과 연계하여 안덕면 감은리 뒷산에서 적군과 마주쳐 교전 끝에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 의진은 좌익장 권성하(權成夏) 등으로 하여금 3초(哨; 1哨당 1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 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의병 해산 조칙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다가 1926년 3월 28일 별세하였다.
199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