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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1:41:49

자오빙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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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장.svg
중화민국 북양정부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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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병균.jpg
중화민국 3대 국무총리
정체 趙秉鈞
간체 赵秉钧
한국식 독음 조병균
영문 Zhao Bingjun
지암(智庵)
출생 1859년 2월 3일
청나라 하남성 여주현
사망 1914년 2월 27일 (향년 55세)
중화민국 직예성 톈진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직업 관료, 정치가
국무총리
재임 기간
대행 1912년 8월 20일 ~ 1912년 9월 25일
3대 1912년 9월 25일 ~ 1913년 5월 1일

1. 개요2. 생애
2.1. 신해혁명까지2.2. 중화민국 3대 국무총리2.3. 의문의 죽음
3. 참고문헌4.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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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말의 관료, 중화민국 3대 국무총리.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물러났다.

2. 생애

2.1. 신해혁명까지

1859년 하남성 여주에서 태어났다. 북양군벌의 산하에 들어가 위안스카이의 심복이 되었으며 치안 업무를 주로 맡아 민정부 시랑에 임명되었으며 1902년 경찰제도가 마련될 때 그 책임자를 맡았으나 위안스카이가 파면되면서 같이 파면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위안스카이가 복직되자 위안스카이의 명을 받고 청실을 핍박하여 퇴위할 것을 강요했다. 1912년 1월 19일 어전회의에서 후웨이더, 량스이와 함께 혁명당의 힘이 막강하고 북방군도 믿을 것이 못되며 위안스카이가 이미 톈진에 임시정부를 수립해 혁명당과 협상하고 있음을 통보하고 분노하는 황족들에게 이미 군주제 유지는 어렵게 되었다고 하며 황족들이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사직하겠다고 어전회의에서 퇴장했다.

1월 26일 군주제 유지를 주장하는 종사당의 우두머리 왕필이 폭탄에 맞아 죽자 놀란 융유태후가 자오빙쥔과 량스이, 후웨이더 등을 입궐시켜 위안스카이에게 잘 말해서 황실의 목숨만은 보존시켜 달라고 통곡했고 결국 2월에 선통제가 퇴위하면서 청나라는 멸망하고 1912년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는데 중화민국의 첫 내각인 탕사오이 내각이 출범하자 자오빙쥔은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2.2. 중화민국 3대 국무총리

파일:국무총리조병균.jpg
국무총리 시절의 자오빙쥔

허나 탕사오이가 총리가 된 데에 불만이 많았던 자오빙쥔은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고, 혁명당과 친해져 더 이상 위안스카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탕사오이의 명령을 거부하고 국무회의에 불참하는 등 노골적으로 국무총리의 권위를 무시했으며 "지금은 국내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 급한 만큼 각의에 나가서 함부로 무슨 말을 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라는 궤변을 지껄이기도 했다.

계속되는 핍박에 견디지 못한 탕사오이가 6월에 하야하자 외교총장 루정샹이 국무총리 대리가 되었다가 6월 29일 정식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7월 중순에 육군총장 돤치루이, 내무총장 자오빙쥔, 해군총장 유관웅을 제외한 모든 내각이 사퇴하자 루정샹은 이를 대체할 내각 명단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참의원에서 부결되고 결국 참의원에서 탄핵된 루정샹은 칭병하여 출근을 거부하다가 결국 잘렸는데 자오빙쥔이 리위안훙이 창설한 공화당의 지지를 얻어 8월 20일 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되었다. 1912년 8월 24일 쑨원-위안스카이 회담 끝에 국민당은 자오빙쥔과 그 내각이 국민당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국무총리에 임명하는 것에 동의했다.

자오빙쥔은 그 자신이 동맹회에 가입했고 국민당에도 가입하여 여러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는데 황싱의 설득으로 자오빙쥔 내각의 사법총장 허세영, 농림총장 진진선, 농상총장 유규일, 교통총장 주계금 등이 모두 국민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재정총장 주학희와 외교총장 왕여호는 입당 원서는 쓰지 않았으나 국민당에 입당했다고 밝혔다. 공화당원인 진진선은 탈당하고 사직하여 농림총장 진진선이 겸하게 되었다. 허나 자오빙쥔은 정계의 기대와 달리 위안스카이의 독재 정치에 영합하였다. 자오빙쥔은 국무회의를 국무원이 아니라 총통부에서 주재하고 모든 업무를 위안스카이에게 전달하면서 대총통이 실질적인 정무를 보게 도우며 내각책임제를 붕괴시켰고 여러 범죄 행각을 저지르게 된다.

1913년 총선이 실시되었을 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 그런데 1913년 총선에서 쑹자오런이 대리 이사장으로 이끄는 국민당이 압승을 거두었는데 쑹자오런은 내각책임제, 지방자치제를 주장하면서 자오빙쥔 내각의 무능을 비난했다. 가뜩이나 쑹자오런에게 총리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던 자오빙쥔은 쑹자오런을 아주 미워하게 되었는데 결국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아 비서 홍술조를 사주하여 쑹자오런 암살을 지시하게 되었다. 결국 1913년 3월 20일, 홍술조가 사주한 자객 무사영이 상하이의 기차역에서 쑹자오런을 저격했고 3월 22일 쑹자오런은 사망했는데 이것이 바로 쑹자오런 암살 사건이다. 허나 금방 무사영이 체포되고 무사영에게 자금을 제공한 응기승 역시 체포되면서 암살 사건은 꼬투리를 잡히게 된다. 이에 국민당이 자오빙쥔과 홍술조의 출두를 요구하였고 자오빙쥔은 사직하여 혐의를 벗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위안스카이는 사직하면 혐의가 더욱 커진다고 그의 사의를 반려했다.

쑹자오런 암살로 국민당 내부에서 무력봉기가 주장되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는 자오빙쥔에게 지시하여 정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5개국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의 대규모 차관을 들여오게 했다. 자오빙쥔은 국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원들을 무시하고 4월 26일, 재무총장 주학희와 함께 일방적으로 차관 계약을 체결한 다음에 정문을 포위한 의원들을 피해 뒷문으로 달아났는데 이것이 바로 선후대차관 사건이다. 이날 강소도독 정덕전이 자오빙쥔이 쑹자오런 암살을 사주했다는 여러 증거를 발표하면서 자오빙쥔은 엄청난 비난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여론의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자오빙쥔을 총리 자리에서 경질하여 육군총장 돤치루이가 대행하게 했다.

2.3. 의문의 죽음

경질된 자오빙쥔은 직예총독으로 이동했고 머지 않아 국민당은 위안스카이 타도를 위해 계축전쟁을 일으켰다. 계축전쟁은 2달 만에 진압되었으나 자오빙쥔은 얼마 안되어 1914년 2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이를 두고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 암살 사건의 입을 막기 위해 사주한 일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1915년 홍헌제제 이후 충양공(忠襄公)에 봉해졌다. 근데 백일만에 제국 붕괴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1] 8개 당적 동시 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