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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38:18

제프리 르 스크루프

성명 제프리 르 스크루프
Geoffrey le Scrope
생몰년도 1285년~ 1340년 12월 2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메섬
사망지 플란데런 백국 겐트
아버지 윌리엄 르 스크루프
어머니 콘스탄스 피츠윌리엄
형제 윌리엄, 스티븐, 성명 미상의 누이
아내 이베트 드 로스
자녀 헨리, 제프리, 윌리엄, 토머스, 스티븐, 베아트리체, 콘스탄스, 이베트
직위 잉글랜드 대법관, 기사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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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대법관, 군인. 에드워드 2세 에드워드 3세 치세에서 활약했다.

2. 생애

리치먼드 배국의 집행관이었으며, 1298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독립운동가 윌리엄 월레스를 상대로 결정적으로 승리한 폴커크 전투에 참전한 뒤 기사가 된 윌리엄 스크루프와 웬슬리 기사 토머스 피츠윌리엄의 딸 콘스탄스의 차남이다. 형으로 그처럼 잉글랜드 대법원장이 된 헨리 르 스크루프가 있었고, 동생으로 웨스트 볼튼의 부동산을 큰형 헨리에게 줬다는 것만 알려진 스티븐 르 스크루프가 있었다. 또한 머스크의 기사 윌리엄 드 클레즈비의 아내가 된 성명 미상의 누이도 있었다.

그는 형 헨리와 함께 일찍부터 법학 공부를 했고, 1292년 형 헨리가 왕의 법정 변호사가 된 후 집안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순조롭게 출세할 수 있었다. 1306년 토머스 메이닐의 변호사로 선임되었고, 1309년 성 미카엘 축일에 집행관이 되었으며, 1315년 부활절 무렵에 왕의 집행관 중 한 명이되었다. 1317년 형이 대법관이 된 뒤 정기적으로 의회의 판사로 부름을 받았으며, 때로는 사법위원회에 참석했다. 1313~1314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정적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변호사 중 한 명으로 등재되었지만, 실제로는 에드워드 2세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1321년 궁중 추밀원에 참여했으며, 에드워드 2세의 왕권 강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특히 도시들의 전통적인 자치권을 지속적으로 억누르려 해, 도시 유지 및 시민들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다.

1322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비롯해 에드워드 2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귀족들을 처형하는 재판을 주관했으며, 1323년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의 재판 역시 주관해 유죄를 선고했다. 1323년 9월 27일 일반 항소 법원의 판사가 되었고, 1324년 3월 21일에 형의 뒤를 이어 국왕 법정의 대법관이 되었다. 1323년 10월 2일에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1323년 5월30일 비숍쇼프에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간의 평화 협약을 체결한 위원 중 한 명이었으며, 1324년 스코틀랜드와의 최종 협약을 맺기 위한 협상에 참여했지만 협상이 결렬되는 걸 막지 못했다.

1326년 에드워드 2세가 초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반란으로 몰락했다. 런던 주민들은 혼란을 틈타 그의 집을 약탈했다. 이에 그는 10월 13일 이자벨 왕비에게 귀순한 뒤 대법관 직을 유지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327년 1월 에드워드 2세의 퇴위를 강요한 대표단의 일원이었으며, 그해 7~8월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한 스코틀랜드군을 상대하기 위한 모티머의 원정에 참여했다. 1328년 3월 17일 에든버러에서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상을 벌인 위원 중 한 명이었다. 1328년 5월에 체결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최종 협약인 노샘프턴 조약 초안을 준비했으며, 각지의 귀족들이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단속하기 위한 법원 총회를 부활하는 데에도 관여했다. 1329~1330년 노샘프턴셔에서 열린 사법 회의를 주관했으며, "지상의 평화가 유지되고 보존될 수 있으며 앞서 언급한 비행과 범죄가 시정될 수 있다"는 말로 자신의 강령을 설명하는 연설을 했다.

1330년 11월 로저 모티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친위 쿠데타로 타도된 뒤 에드워드 3세의 고문이 되었다. 1332년 의회에서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와의 관계뿐 아니라 국내 법치 보장에 관해 여러 차례 중요한 연설을 했으며, 미들랜드 14개 카운티의 평화 파괴자를 토벌하는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330년 에드워드 3세가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문제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으며, 1333 ~ 1334년 파리에서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동맹인 스코틀랜드를 공격한 것과 관련한 외교 분쟁을 해결하고자 협상을 벌였다. 133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에게 파견되어 잉글랜드와 신성 로마 제국이 프랑스를 상대로 공동 대응하는 문제를 논의했으며, 1340년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

1338년 부활절에 대법관 직임을 사임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으며, 1339년 10월 초 분견대를 이끌고 피카르디 일대를 약탈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0월 23일 라 카펠 인근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할 때도 참여했다.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1340년 에드워드 3세가 의회에 정치적 양보를 하는 대가로 군자금을 지원받는 합의안을 도출하는 데 기여했다. 1340년 5월 3일, 에드워드 3세는 그동안 자신에게 "자발적이고 반복적으로 귀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며 연금 300마르크를 그에게 할당하기로 했다.

1340년 11월 말 플란데런에 있던 에드워드 3세가 예고 없이 잉글랜드로 돌아와 켄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를 비롯한 목사들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공격한 것에 대해, 세간에서는 스크루프가 왕을 현혹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1340년 12월 2일 스크루프가 겐트에서 사망했을 때, 존 드 스트랫퍼드 지지자들은 이를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여겼다. 그의 유해는 잉글랜드로 옮겨진 뒤 코버햄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