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창설된 전투경찰에 대한 내용은 전투경찰순경 문서 참고하십시오.
왼쪽부터 6.25 전쟁 당시 학도의용군, 전투경찰, 대한민국 국군 복장을 재현한 모습 |
전투경찰관의 전투복. 전투를 위해 경찰용 철모도 지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전투경찰 참전용사 영결식은 대한민국 국군 의장대가 아닌 참전용사의 후배인 경찰의장대[1]가 주최한다. |
6.25 전쟁 70주년 유해봉환식 때 배치된 치안국 부대기 |
1. 개요
전투경찰은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대한민국 국군과 함께 일선 전투에 참전했거나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하는 적 유격대를 포착, 섬멸하기 위해 전투에 참전했던 경찰관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표현이다.2. 상세
전쟁 초기 빈약한 무장과 보급, 조선인민군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남하와 같은 악조건 하에 주로 지연전을 펼쳤다.당시에는 전차와 중화기로 무장한 북한군에게 국군도 속수무책이었으니 볼트액션식 99식 소총이 주무장이었던 당시 경찰은 말할 것도 없었던 상황. 그런 상황에 이들은 자의나 타의로 적이 점령한 지역에 남아 함께 남은 국군과 함께 북한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유격전을 펼쳤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대한민국 국군과 함께 후퇴한 경찰들은 전쟁 초기 최후의 보루를 지키던 전투인 다부동 전투에도 약 15,000명이 참전하여 작전 성공에 뒷받침했다.
그 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고립된 적들이 아군측 후방지역에서 유격전을 펼치자 이들을 포착하고 섬멸할 목적으로 정식으로 창설되어 빨치산 토벌 작전을 펼쳤다. 토벌 작전에 동원된 이들은 전술한 인원과는 다른 전투경찰대로 정식 창설된 인원이었다.
이들의 특징은 오로지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한 조직이므로, 대민 업무 및 치안유지가 목적인 일반 경찰과는 다른 조직내의 조직이었고 자체적인 민간인의 지원, 선발 과정이 있었다는 점이다. 일단 전투경찰대에 배속되면 국군에 입대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1967년 창설한 전투경찰순경도 초기에는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후에 '지원제 전투경찰'이라고 불리게 되는 전투경찰순경의 초기 형태가 그렇다. 전투경찰순경에 지원해 배속되면 일반 군복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시행 몇 년 뒤 차출제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