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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18:51:02

전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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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7년 11월 18일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인좌리
사망 1943년 10월 8일 (향년 65세)
평양형무소
호은(湖隱), 정송(梃松)
본관 정선 전씨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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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7년 11월 18일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인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인석의 문인으로,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관서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항쟁했지만 1906년 체포되어 그해 11월 유배형 15년을 선고받고 황주로 유배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 후 대사면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1912년 만주로 망명한 뒤 유인석을 모시며 독립운동을 꾀했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만주의 한인 교포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그는 박장호, 조맹선, 김평식(金平植)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여 군사부장을 역임해 무장항일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대한독립단이 연호의 사용문제로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분열되자, 이씨 왕조의 복벽을 신봉했던 그는 기원독립단의 영수로 활동했다. 그는 단신으로 평양을 10여 차례 왕복하면서 군자금을 조달했다.

1920년 4월,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제2차 정기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내빈으로 초청되어 윤창선(尹昌善)·양기하(梁基瑕)·백진해(白鎭海)·김유성(金有聲) 등과 함께 독립단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정신을 고무시켰다. 이후 1922년 만주에 있는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통군부(統軍府)를 조직하였을 때에도 재무부장으로서 군자금을 조달하였으며, 동년 8월 대한통군부가 대한통의부(統義府)로 개편되자 경무감(警務監) 및 참모부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통의부 내 복벽파 영수로서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인사들과 심각한 갈등을 빛었다. 정이형의 회고록 <나의 망명추억기>에 따르면, 어느 날 전덕원이 이끄는 독립단 간부였던 김시영 소대장이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에 통의부 지도부는 그를 제대시키고 그 여자와 다시 관계하지 못하게 하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시켰다. 이후 김시영은 부대를 떠난 뒤 더이상 제재를 받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그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독립단 군인이 남편을 죽이고 그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소문이 돌자, 검무감 김관성이 검무원을 시켜서 김시영을 체포해 매를 난타하고 김시영을 따랐던 독립단 간부들을 모두 부대에서 내쫓게 했다.

전덕원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부하들이 모욕당했다고 여기고 복수할 기회를 엿봤다. 1922년 10월 14일, 그는 독립단 군인을 소집하여 이종성의 집에 머물고 있던 양기탁, 현정경, 김관성, 황동호 등 10여 명을 포박하고 조선총독부의 정탐으로 만주 독립군의 파괴공작을 한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살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가 사살되었고 양기탁과 현정경, 김관성, 황동호 등은 난타당했다. 하지만 그는 가장 주요한 목표였던 비서과장 고활산을 잡지 못하자 달아났다. 정이형의 증언에 따르면, 전덕원이 독립운동계의 원로 양기탁을 핍박한 것은 당초 그가 대한통의부에서 검무감에 임명되고 자신보다 나이 어린 오동진이 교통국장에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었고, 양기탁이 그를 비호했다고 여겨 양기탁 등 지도부에게 반감을 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파벌을 이끌고 1923년 봄에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한 뒤 총장으로 채상덕을 추대하고 자신은 군무총감으로 취임해 대한통의부에서 이탈했다. 대한통의부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지방대표자대회를 3일간 개최하여 논의한 끝에 전덕원의 행동을 용납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그의 도움이 없이는 군사적 역량이 떨어지는 점을 감안해 전덕원과 제일 친한 이천민을 베이징에서 불러 대한통의부의 군사책임을 맡기고 전덕원과 타협하기로 했다.

1923년 8월 8일, 유격대장 이경일(李京日), 소대장 전일록(全日錄) 등 부하 50여명을 시켜 평북 의주군 청성진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양으로 대원들을 잠입시켜 평양경찰서원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1927년 2월에는 봉천성 장하현 임가구에서 국내에 있는 일본관공서 및 고관 암살을 계획하던 중 안동현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1년 이상 미결수로서 옥고를 치르던 그는 1928년 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이 선고받자 자신의 형량이 가볍다면서 죄명이 강도죄인 것에 항의했다. 이후 4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1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동지들과 함께 독립사를 편찬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려다 박상문(朴尙文)의 밀고로 다시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3년 10월 8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전덕원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