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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32A62><colcolor=#fbe673> 신라 문성왕의 정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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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장보고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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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 미상[1] |
성씨 | 장(張) |
부모 | 부친: 장보고 |
부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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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슬하 1남? 아들 - 궁예추정 |
봉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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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rfix]
1. 개요
신라의 여성. 문성왕의 차비가 될 뻔했지만 협상이 결렬되어 사서에서 어떠한 공식 직함도 갖지 못하게 된 비운의 여성이다.김우징(후일 신무왕)이 장보고의 군대를 통해 민애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는 대신, 그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는 것을 장보고에게 제안했고, 이로서 왕위 탈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약속한 신무왕은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뒤이어 즉위한 문성왕은 그의 딸을 차비[2]로 삼으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장보고 가문의 미천한 신분을 문제로 삼아 혼인은 결렬되었다. 이에 장보고는 신무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장군 염장에 의해 결국 암살당한다.
2. 왕비?
일반적으로는 위와 같이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녀가 궁예의 생모라는 설이 있다. ##
[1]
김우징과 장보고의 사돈 약속이 838년이니 그녀 또한 빨리 잡아도 822년/823년 생으로 추정된다.
[2]
후궁이 아니라 두 번째 정실 부인이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임금은 여러 명의 정실 부인을 둘 수 있었고 정실 부인을 반드시 한 명만 두어야 한다고 정한 것은
조선 태종 이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