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 주브넬 데 우르생 Jean Jouvenel des Ursins |
출생 | 1388년 11월 23일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473년 7월 14일 |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 |
가족 | 아버지 장 주브넬 데 우르생, 어머니 미셸 드 비트리 |
형제 기욤, 미셸, 자크 | |
직위 | 보베 주교, 랑 주교, 랭스 대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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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랭스 대주교. 잔 다르크의 복권에 기여했고 백년전쟁 마지막 시대의 연대기를 집필했다.2. 생애
1388년 11월 23일 프랑스 왕국의 수도 파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장 주브넬 데 우르생은 파리 법원의 대변인이자 파리 상인들의 장관을 역임했고, 도팽 루이의 총리로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을 때 아르마냑파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413년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샤틀레에 투옥되었지만, 뒤이은 학살을 모면했고, 나중에 석방되어 도팽 샤를이 있는 부르주로 피신해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어머니 제네비에브 드 에롱은 샤를 6세의 재정 고문이었던 장 르 메르시에의 조카이다. 형제로 기욤, 미셸[1], 자크[2]가 있었다.일찍이 교회 경력을 시작한 그는 오를레앙 대학교와 파리 대학교에서 교회법과 민법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삼부회에서 왕실 관리를 맡았다. 1418년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이 파리를 점령한 후 가족과 함께 푸아티에로 피신해 도팽 샤를의 휘하로 들어갔다. 1429년 왕의 변호사이자 왕실 목사가 되었고, 카르미네의 대주교이자 아브랑슈의 도옌이 되었다. 1431년 루앙에서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아 화형을 선고한 피에르 코숑을 보베 주교로 교체했다. 1435년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샤를 7세간의 아라스 평화 협약에 참여했고, 1439년 오를레앙에서 열린 삼부회 회의에 참석해 샤를 7세의 중앙 집권화 정책을 옹호했다. 또한 잉글랜드군의 침략에 대비해 보베 시와 주교구를 방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444년 랑 주교로 산임되었고, 1449년 형제 자크의 뒤를 이어 랭스 대주교를 맡았다. 이후 잉글랜드 및 부르고뉴와의 협상에 여러 차례 참여해 프랑스의 이권을 쟁취하는 데 기여했다. 1455년 잔 다르크의 복권을 위해 교황 갈리스토 3세와 협상했으며, 1461년 8월 15일 랭스 대성당에서 프랑스의 새 국왕 루이 11세의 대관식을 주재했다. 1462년 루이 11세의 요청에 따라 기욤 쿠지노 드 몽트뢰유와 함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의 프랑스 왕좌에 대한 주장을 반박하는 논문을 작성했다. 이후 푸아티에 교구와 프레쥐 교구를 통치했고,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직위를 명목상으로 유지했다. 1473년 7월 14일 푸아티에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