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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5:15:06

장 뷔로

파일:장 뷔로.jpg
이름 장 뷔로
Jean Bureau
출생 1390년
프랑스 왕국 샹파뉴 세모느
사망 1463년 7월 5일
프랑스 왕국 파리
아버지 시몽 뷔로
어머니 엘린
형제 가스파르 뷔로
배우자 잔 제르맹 헤셀랭
자녀 장, 피에르, 시몽, 필리파, 이자벨
직위 프랑스 재무장관, 프랑스 포병대 그랜드마스터, 라 로셸 시장, 파리 상인의 장관, 보르도 시장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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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본래 부르주아 출신으로, 포병대 혁신을 이뤄내 백년전쟁의 승리를 이끌어내면서 귀족의 반열에 올랐다.

2. 생애

1390년경 프랑스 왕국 샹파뉴 세모느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상인인 시몽 뷔로와 엘린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가스파르 뷔로가 있었다. 1420년 변호사로 일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해 법학을 공부했고, 베드퍼드 공작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파리 샤틀레 요새의 법률 위원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요새에 주둔한 포병들이 대포를 쏘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면서, 대포의 위력을 키우는 기술을 연마하면 나중에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눈치챘고, 이후 형제 가스파르와 함께 대포의 성능을 향상하는 방안을 고심했다. 수 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뷔로 형제는 좀더 빠른 속도로 포탄을 발사할 수 있으며, 현장에서 혼합할 필요가 없는 더욱 강력한 화약을 생성했으며, 청동 대포 주조 기술을 개량해 대포가 발사하는 와중에 깨질 가능성을 줄이면서 목표 지점으로 좀더 정확하게 쏠 수 있게 했다.

1434년경 샤를 7세를 따르는 프랑스군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파리로의 물자 수송이 자주 끊기면서 굶주림이 일상이 되어버리자, 뷔로 형제는 대세가 샤를 7세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수도를 떠나 샤를 7세에게 투항했다. 그들은 좀더 강력하고 정확한 대포를 훨씬 빨리 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고, 샤를 7세는 이에 마음이 동해 그들을 포병대 장교로 선임했다. 1438년, 장 뷔로는 모 공방전에 참가해 공성포를 개량하여 성벽을 효과적으로 파괴해 수비대의 항복을 유도했다. 샤를 7세는 그의 공헌을 인정하여 왕실 서신을 통해 그를 포랑스 포병대 그랜드마스터로 선임했다. 이후 장 뷔로는 1445년 3월 21일 빌몽블의 영주가 된 형제 가스파르와 함께 야전 포병을 재편하고 청동 대포의 성능을 꾸준히 개량했다.

뷔로 형제는 뒤이은 노르망디와 가스코뉴에서 의 모든 전투에서 포병대 및 궁수대를 이끌었다. 1441년 퐁투아즈 공방전에 참여했고, 1449년 아르플뢰르 공방전에도 참전해 두 곳을 공략하는 데 일조했다. 뒤이어 바이외와 캉을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편, 뷔로는 파리의 세금 징수원으로도 활동했으며, 1443년에는 프랑스의 재무장관으로 선임되었다. 1447년 10월 부르주에서 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바스리무쟁, 마르쉐 등지의 재정 담당 위원을 맡았고, 파리 상인의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1450년 4월 15일 포미니 전투에 참가한 장 뷔로는 포병들을 이끌고 최선두 대열로 가서 2개의 중포를 설치한 뒤 적을 향해 포탄을 발사했다. 이전의 부정확하고 연사 속도가 매우 느렸던 대포들과는 달리, 이번 대포는 상당히 정확했고 연사 속도도 빨라서 잉글랜드군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숙련된 잉글랜드 궁수들은 곧 냉정을 되찾았고, 일부 궁수들은 대열을 이탈하여 적 포병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빠르게 제압한 뒤 대포 2문을 탈취해 잉글랜드 전선으로 가져갔다. 그래도 뒤이어 본격적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을 궤멸했다.

1450년 가스코뉴 원정에 가담해 가스코뉴의 수도 보르도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이후 1452년 8월에 아라곤 왕국으로 파견되어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1452년 8월에 잉글랜드 장군 존 탈보트의 군대가 가스코뉴에 상륙해 보르도를 비롯한 서부 가스코뉴를 도로 탈취하자, 1453년 제2차 가스코뉴 원정을 떠난 프랑스군에 가세했다. 1453년 7월 초, 프랑스군은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작은 성벽 도시인 카스티용을 포위했다.

프랑스군은 보르도에서 달려올 적과 카스티용 수비대의 협공을 피하기 위해 카스티용 동쪽 고지대에 숙영지를 세웠다. 이후 700명의 프랑스 공병들이 4일 동안 쉬지 않고 포대를 건설했고, 그 앞에 3개의 참호를 팠다. 포대의 길이는 약 700야드, 너비는 200야드에 달했다. 프랑스군 숙영지는 도르도뉴 강과 평행하게 형성되었고, 숙영지 북쪽에는 리도아르 강의 비교적 가파른 제방이 위치하여 그 방향에서 오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천연 해자 역할을 했다. 또한 잉글랜드 진영 외곽에 흙과 나무를 이용한 방어벽이 설치되었다. 이때 대포는 중포, 경포, 석궁 발사기, 핸드 캐논 등 여러 종류가 있었으며 총 300문에 달했다. 핸드캐논과 경포는 벽을 따라 장착되었고, 중포는 거점에 집중되었다. 이렇듯 프랑스군은 적의 에상되는 공세에 대비해 난공불락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 인근에 도착한 존 탈보트는 프랑스 숙영지를 그대로 공격했다. 그리하여 벌어진 카스티용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00문에 달하는 대포의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잉글랜드군을 압도했고, 오랜 세월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렀던 존 탈보트는 전사했다. 장 뷔로는 뒤이은 보르도 공방전에서 포병대를 진두지휘했고, 수비대는 3개월을 버티다가 결국 10월 19일에 무조건 항복했다. 샤를 7세는 카스티용 전투의 승리를 이끈 장 뷔로를 보르도의 종신 시장이자 몽그라스의 영주로 임명했다. 장 뷔로는 보르도 시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샤토 트로페이트 성을 세웠다.

1461년 프랑스 새 국왕으로 즉위한 루이 11세는 장 뷔로를 기사로 선임하고 국왕 평의회 의원으로 임명했다. 이후 왕의 고문으로서 활동하다가 1463년 7월 5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