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무기로 둔갑한 의자 |
[clearfix]
1. 개요
1990년 8월 26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경기 중, 원정팀인 해태 관중 5백여 명이 집단으로 경기장에 난입한 후 LG 관중들에게 위협을 가하자 총 1천여 명의 양측 관중들이 집단 패싸움을 벌인 사건. 이 사건으로 19명의 관중이 구속되었다. 관련 기사1986년 일어난 해태 타이거즈 버스 방화 사건과 더불어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관중 폭력 사건으로 꼽히며 이 사건은 해태-KIA 타이거즈와 LG 트윈스 양팀이 KBO 내에서 한일전 정도는 가소롭게 보일 정도로 최악의 라이벌로 자리잡는 신호탄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해태 타이거즈는 최악의 사건 2개를 모두 경험한 레전설 팀이 되었다.[1]
2. 사건 진행과정
플레이오프 직행 티켓이 걸린 정규리그 2위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하던 해태와 LG는[2] 8월 26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대접전을 벌였다.경기는 에이스들의 부상이나 컨디션 저하를 잘 피해 전력을 보전하는데 성공한 LG가 해태 마운드의 소모를 노리면서 짧은 단타 위주로 진행해 3:0으로 경기를 리드해 나갔고 이에 전황을 뒤집어야 하는 해태는 결국 큰 거 한방을 노리기 시작했다.
LG와 해태, 양측의 투수들이 모두 호각을 이루던 상황이라 해태팬들은 역전을 위해선 장타자들의 한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5회와 6회 연속해서 3루타가 나오면서 희망고문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7회말 3:0으로 LG가 앞서나가던 상황에서 해태 마운드가 도루 저지를 실패하고 7회에서 급격히 무너지면서 한 회 동안 7점의 대량실점을 내주고 말았다. 그렇게 10:0으로 해태의 패색이 짙어지자 극도로 흥분한 해태 팬 약 500여 명이 그라운드로 난입했다.
그라운드로 난입한 해태팬 들은 LG쪽 응원석에 불을 지르고 쓰레기통을 마운드로 내던졌으며 어디서 구했는지 각목과 철제의자를 휘두르면서 선수와 심판을 내쫓고 경기장을 점거한 후 LG쪽 응원석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LG 팬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몰수 게임이 선언되었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원정팀인 해태 팬들이 난동을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홈 구단에게 몰수게임을 선언할 수 없었다. 난동은 한 시간이 넘게 지속되었다. 경찰이 투입되었고 약 1시간 10분 후에 가까스로 경기가 재개되었다. 재개된 경기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LG의 13:1 대승으로 끝났다.
|
3. 결과
"페어플레이를 벌여야 할 경기장에서 난동을 부린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용납될 수 없으며 특히 올림픽까지 치른 나라에서 이같은 행위는 더욱 용납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법과 질서를 바탕으로 해야 함에도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으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는 풍조는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 관련자를 가려 법에 따라 엄정 처리하라."
노태우 대통령
한 시간 가깝게 이어진 패싸움은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고[3] 총 10여명이 병원 신세를 졌다. 경찰은 TV 방송 자료를 분석하여 싸움을 주도한 19명을 폭력혐의로 구속, 기소했고 이 중 구장에 불을 질렀거나 의자로
체어샷을 시전한 관중 11명에게 집행유예 선고를 내렸다.노태우 대통령
혼란을 피해 라커룸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인천 감독은 경기 후 “할 말이 없다.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애정을 아름답게 쏟아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LG 팬들에게도 간곡히 부탁드린다.”는 말을 남겼으며 김응용 감독은 “내 책임이 크다. 해태를 사랑하는 팬들을 위해 이겨줘야 하는데…. 해태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부끄럽다. 팬들이 다음경기를 위해 승부가 기운 상황에서 2진급 투수를 내보내야 하는 어려움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초유의 폭력 사태다 보니 감독과 선수들도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사상 초유의 대규모 관중 폭력 사건이 일어나자 언론은 이 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했고 급기야 노태우 대통령이 입장을 표명하고 이 사건을 엄중하게 처리하도록 특별 지시하기까지 했다. 노 대통령은 "페어플레이를 벌여야 할 경기장에서 난동을 부린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용납될 수 없으며 특히 올림픽까지 치른 나라에서 이같은 행위는 더욱 용납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법과 질서를 바탕으로 해야 함에도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으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는 풍조는 뿌리 뽑아야 할 것. 관련자를 가려 법에 따라 엄정 처리하라."고 말했다.
사건 다음날인 27일 KBO는 홈구장으로서 안전보장과 경기장관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LG 구단에 제재조치를 내렸다. 그러자 LG 구단은 제재조치에 대해 격렬히 항의했다. LG 구단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며 격분했다. LG는 KBO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해태팬의 난동)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KBO가 책임회피에만 급급하고 있다."고 강도높게 KBO를 비난했다. 한편 발단을 제공한 해태 측은 LG가 잠실구장 수용 인원보다 많은 인원을 입장시켰다는 주장을 펴면서 책임을 전가하려 들었지만 야구인들의 반응은 '야구장 유리창을 깨고 들어오는 해태팬들을 무슨 수로 막냐.'는 의견이 다수였다고 한다. #
4. 이후
이후 양 팀은 선수단과 팬덤 불문하고 KBO 역사상 손꼽히는 불구대천의 라이벌이 되었고 양 팀의 잠실경기는 KBO 역사상 최고의 흥행카드가 되었다. 양 팀의 라이벌 의식은 해태의 마지막 전성기였던 1997년 한국시리즈[4]를 통해 더욱 견고해졌다. 그리고 26년 뒤...
[1]
차이점이 있다면 버스 방화 사건은 삼성 관중들이 저지른 일이지만, 패싸움 사건은 해태 관중들이 먼저 벌인 일이라는 것이다.
[2]
당시 페넌트레이스 1위는
빙그레 이글스였고
삼성 라이온즈가 4게임차로 뒤지던 2위였다. LG와 해태는 각각 3위, 4위였는데 2위 삼성과 3위 LG는 1.5게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정규시즌이 막바지로 흐르자 이 순위는 크게 요동쳤다. 빙그레와 삼성이 각각 3위와 4위로 미끄러지고 해태가 2위 자리에 올랐으며 LG가 창단 후 최초로 페넌트레이스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1위 LG와 4위 삼성의 승차는 불과 4게임. 결국 그해 포스트시즌에서는 1위 LG와 4위 삼성이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만났다. 결과는 LG 트윈스의 창단 첫 우승. 얄궂게도 12년 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위 삼성과 4위 LG가 만났고 결과는 삼성 라이온즈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
[3]
저 정도의 패싸움 정도면 유럽에서는 아예 폭동으로 규정되어 경찰에 의해 곤죽이 되도록 곤봉으로 쳐맞고 체포되어 높은 확률로 실형이 내려진다. 사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는 스포츠 경기 중 이보다 훨씬 심각한 사건도 많이 벌어졌기 때문에 스포츠에서의 폭력사태를 뿌리 뽑기 위해 강경대응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여태까지 한국 스포츠계에서는 사람이 죽은 일은 없었다.
[4]
이 해 정규시즌 잠실경기에서 해태는 무려 5번이나 8회 이후 역전패를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