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공동선언 일소공동선언 |
日本国とソヴィエト社会主義共和国連邦との共同宣言 日ソ共同宣言 |
Совместная декларация Союза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и Японии Советско-Японская Совместная Декларация |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1945년, 소련은 얄타 회담에서 미국 · 영국과 약속한 바에 따라 일본 제국과의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국교를 단절한 뒤 대일(對日) 전쟁을 개시했다. 그 결과 소련군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 사할린 섬 남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고 일본은 1945년 9월 2일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하지만 일본 열도는 미군이 단독 점령하였고, 소련은 연합국의 일원임을 내세워 일본 열도 통치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다. 사실 소련은 GHQ의 자문기구인 대일이사회에 참가할 자격이 있었지만 '푸른 눈의 쇼군', '일본 대통령'으로 불리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대일이사회를 무시하였고, 미국 정부도 일본 열도 통치권을 소련과 공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때문에 일본과 소련 간의 외교 채널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다 패전 이후의 혼란스러운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하자 연합국과의 강화가 일본 정계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야당 일본사회당은 미국 · 영국 · 프랑스 · 중화민국을 비롯한 서방뿐만 아니라 소련과도 강화를 맺을 것을 주장했으나,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소련을 배제한 서방과의 단독 강화를 지지했다. 이 무렵, 소련이 중화인민공화국과 맺은 동맹 조약에서 '일본 군국주의 부활 견제'가 명기된 사실이 알려지며 일본 국민들의 반소 감정이 심화되고 있었다. 게다가 1950년 한반도에서 발발한 6.25 전쟁에서 일본이 대한민국의 후방 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소련은 북한을 지원함에 따라 일본-소련 양국의 국교 정상화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일본은 요시다 시게루의 단독 강화 노선을 택했고, 결국 1951년 소련 대사가 불참한 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6.25 전쟁이 휴전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친미 일변도의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퇴진하고 독자 외교를 추구하는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들어섰고, 스탈린 사후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도 평화공존론을 주장하며 일소 양국은 국교 정상화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이 당시 일본은 유엔 가입을 원하고 있었으나 소련은 번번이 거부권을 행사해왔고, 그렇기에 일본 입장에선 유엔 가입을 위해서라도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가 필요했다. 소련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전후 처리의 일환으로 바라봤다.
3. 내용
1. 일소 양국은 전쟁 상태를 종결하고 외교 관계를 회복한다.2. 일소 양국은 각각의 자위권을 존중하고 상호 불간섭을 확인한다.
3. 소련은 일본의 유엔 가입을 지지한다.[1]
4. 소련은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일본인을 석방하고 일본에 송환한다.
5. 소련은 일본에 대한 일체의 배상 청구권을 포기한다.
6. 일소 양국은 1945년 8월 9일[2] 이후의 전쟁 결과로서 생긴 각각의 국가 · 단체 ·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상호 포기한다.
7. 일소 양국은 통상에 관한 교섭을 시작한다.
8. 일소 양국은 어업 분야에서의 협력을 이행한다.
9. 일소 양국은 계속해서 평화 조약의 체결 교섭을 진행하여 조약 체결 후 소련은 일본에 하보마이 군도와 시코탄 섬을 양도한다.
4. 관련 문서
-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
- 한일기본조약 - 한일 국교 정상화
- 중일평화우호조약 -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이후 1978년 중일 양국이 맺은 조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