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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4:46:45

이현웅(1970)

이현웅
李賢雄 | Lee Hyun-Wung
파일:이현웅 프로필 new.jpg
<colcolor=#fff><colbgcolor=#e61e2b> 출생 1970년 7월 4일 ([age(1970-07-04)]세)
경기도 인천시 북구 부개동[1]
본관 함평 이씨
학력 인천부평동국민학교 (43회 / 졸업)
인천효성중학교 (2회 / 졸업)
광성고등학교 (15회 / 졸업)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 법학 / 학사)
소속 정당

현직 이현웅 법률사무소 변호사
약력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인천부평풍물축제 축제위원회 감사
학교법인 신성학원 임시이사
인천 부평사랑회 이사
인천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 위원
부평구청 고문 변호사
국민의당 인천광역시 부평구 을 지역위원장
국민의당 디지털소통기획위원장
국민의당 조직위원장
바른미래당 조직위원장
바른미래당 당규제정위원
바른미래당 인천광역시 부평구 을 지역위원장
바른미래당 정치개혁특별위원
국민의당 인천광역시당위원장 직무대행
국민의당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부평구 을 후보
국민의당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후보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통합위원회 자문위원
국민의힘 인천광역시당 지방선거 공천관리위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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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논란 및 비판
3.1. 반론
4. 정치 활동5. 여담6. 선거 이력7. 소속 정당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당적은 국민의힘이다.

2. 생애

1970년 7월 4일 인천 부개 3동에서 태어났다. 그 후 부평에서 자라고 결혼한 후 아이 둘을 낳고 학교에 보낼 때까지 부평에서 살아온 부평 토박이에 속한다. 현재도 인천에 거주하고 있다. 본관은 함평. 함평 이씨 집성촌이 전북 고창에 있어서 방학 때마다 자주 내려갔다. 집안에 손이 귀해 태어났을 때는 할아버지가 소를 잡아 마을 잔치를 했었다. 아버지 고향은 전북 고창, 어머니 고향은 경북 문경으로 지역의 영남향우회, 호남향우회에서 모두 환영받았다.

초등학교는 인천부평동초등학교[2]를 나왔다. 집은 학교 뒤 태양악국 뒤의 단독주택이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백마장입구에서 승희탕(목욕탕)을 끼고 들어오는 부평중, 부평고 학생들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는 체육 선생님, 어머니는 과학 선생님으로 부평중, 부평동중 출신 등에 제자가 많다. 그래서 지역에서 “고 선생, 이 선생 아들”로 불리다가 추후 부모님이 경기교복을 운영할 때는 “경기교복집 아들”로 불리웠다.

중학교는 집에서 먼 신설 학교인 인천효성중학교[3]로 배정되었는데 2번과 35번 버스를 타고 등교했고, 그 후 1984년경 산곡동 한양아파트에서 중학교와 그 후 광성고등학교를 통학하게 된다.

광성고등학교[4]때 공정하게 판단하는 판사와 검사가 매력적이라 생각해 법대 진학을 희망하게 되었는데 안정지향적 성향으로 광성고 문과 1등으로는 역대 최초로 서울대 아닌 연대 법학과를 지원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게 된다.[5]

대학교에 입학 후 처음 M.T.에서 운동권 선배들과 대화하다가 운동권 학생들이 많은 법사회학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반골기질을 물려받아 고등학생 때부터 6월 민주 항쟁에 참여하고 대학생 1학년 때부터 법대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고 군입대 전까지 운동권 학생으로 활동했다.

3학년 때 92년 총학생회 선거의 총본부장으로 활동했고, 총학생회장 선거가 무효가 된 후 아르바이트 등을 하다가 1992년 7월에 입대하는데 37사단이 있는 증평으로 가게 된다. 훈련소를 떠나 탄약창 그중 제천에 있는 제5 탄약창에서 경비중대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제천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연대 운동권 선배들의 사법시험 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에 고민하다가 군대에서 법학 서적들을 보기 시작한다.

1994년 10월 제대 후 복학하여 2년간 학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였고 1997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1998년 사시 1차 합격, 1999년 2차 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시험 40회로 합격하게 된다.[6]

사법연수원에서는 노동법학회 활동을 했고, 시민사회 활동의 일원으로 민변 인천지부, 민주노총 인천지부 고문변호사, 전교조 인천지부 고문변호사로 활동하였다. 특히 현 인천 교육감인 도성훈 교육감과는 형, 동생 호칭할 정도로 친한 사이이며 민주노총 인천본부장이었던 원학운 본부장과는 아버지의 경희대 체대 후배일 뿐 아니라 의기투합이 잘되어 국민의당 국회의원 후보일 적에는 후원회장도 해주셨다.

3. 논란 및 비판

‘아동성매매 가해자 변호 성공’ 홍보

변호사인 이현웅 국민의힘 인천 부평을 후보가 아동·청소년 대상 성매매나 불법촬영 사건 등의 성범죄 가해자를 변호하고 법률자문 플랫폼에 이를 홍보해온 사실이 드러나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에선 서울 강북을에 출마한 조수진 변호사가 공천 직후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사퇴한 바 있다.

27일 한 법률자문 플랫폼의 누리집을 보면, 이현웅 후보는 ‘24년 경력’과 함께 ‘많은 이혼, 성폭행, 손해배상 성공·합리적 비용’을 강조하며 수임 사례를 공개했다. 그는 여성 청소년 성매수 혐의를 받은 의뢰인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사례를 소개하며 “사안을 인정하고 비록 14살의 아동·청소년이기는 하지만 성매수의 죄질이 비교적 가벼운 점, 진심으로 반성하고 합의하려고 노력하는 점 등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피해자는 이 사건 범행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불안한 심리상태를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이 후보는 또다른 청소년 성매매 사건에서도 집행유예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이끌어낸 사례를 소개하며 “의뢰인은 이전에 인터넷에서 청소년 음란물을 구매해 아청법(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의 동종의 집행유예 전과가 있어 치명적으로 문제되고 피해자 청소년의 나이가 많이 어리고(만 13세) 관련 피고인도 많고 합의부에 회부된 사안이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형이 예상되는 사안이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 후보는 “재범의 가능성이 적고, 1회적이고 적극적인 유인행위는 없었다는 점” 등을 변론해 “이례적 선처”를 얻어냈다고 홍보했다.

3.1. 반론

이현웅은 특정 후보 측 제보로 악의적 프레임으로 본인을 공격하는 기사였고, 여러 언론에서도 입장문과 전화로 사실을 확인한 후 자신의 변론이 별문제가 없다고 판단되어 후속보도는 없었다. 그리고 선거운동 기간 악의적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는 참모들의 의견을 수용해 무대응 했다고 입장문을 기재했다.

추가로 조수진 변호사와의 차이점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속보도도 없었고 경쟁 후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당에서도 문제 삼지 않았다.

다음은 SNS에 기재한 입장문의 내용이다. #
선거중 한겨레신문에 저를 지목해 "성범죄 가해자 전문변호 광고 운운"하는 기사가 나서 많은 분들이 걱정하신 것으로 압니다. 사실 특정 후보측 제보로 악의적 프레임으로 후보인 저를 공격하는 기사였고, 저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입장문을 곧 냈고, 여러 언론에서 입장문과 제게 전화해 사실을 확인한 후 제 변론이 별 문제없다고 판단해서 후속보도는 없었습니다. 제 반론까지 추가해 보도한 기사가 하나 있었고, 그 이외에는 없기에 저는 강력하게 대응하고 싶었지만 선거운동 기간동안 악의적 프레임에 갖히게 된다는 참모들의 의견을 수용해 제 생각을 꺾고 무대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세하게 밝혀야겠습니다.

1. 저는 이혼, 손해배상, 임대차, 성범죄무고, 성범죄 피해자 등 다양한 사건의 변론을 했습니다.

2. 형사사건 변론시 죄를 부인하는 경우 적어도 3회이상 만나보고 무죄나 무혐의 변론이 적절할지, 판단했습니다. 거짓말 탐지기 결과 진실반응이 나왔거나, 나아가 변론과정에서 피해자로 지칭된 사람의 진술 신빙성이 현저히 떨어진 경우가 무죄의 경우이며 저는 무죄나 무혐의를 받은 사건은 한 청년의 인생을 무고의 구렁텅이에서 구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성범죄 가해자 변호사의 프레임으로 공격하는 것은 지금 한국 젊은 남성이 겪고 있는 고통에 무심한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무죄나 무혐의 변론은 신중하게 선택했기에 제가 변론한 결과는 무죄로 나왔으며 그 변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임료 또한 저렴했습니다.

3. 그 이외 대부분의 경우는 범죄를 인정하는 경우로 최대한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합의하거나 최소한 공탁하도록 하였고, 재범방지를 위해 교육이수와 적절한 반성을 요구하였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나 변론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제 양심에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4. 선거기간에는 없는 사실도 만들어지고, 악의적 프레임으로 후보를 공격하기도 합니다..심지어는 2016.에는 숨겨놓은 아이가 있다느니, 변호사이면서 아무런 범죄경력이 없는 제게 당선되도 성범죄로 구속되어 임기를 시작하지 못한다느니 하는 구전을 퍼뜨린 경우도 겪어봤습니다. 실제 지지율에 영향도 안주고, 후보인 저는 영향도 안받지만 제 아내나 아들들은 아프고 상처받습니다. 거짓 사실로 가족은 건드리지 맙시다.

5. 이현웅은 수 차 말씀드렸듯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성심을 다해 변론할 것입니다. 혹시 그 기사를 보시고 걱정하신 분이 계셨다면 제가 악의적으로 피해자에게 해가되는 변론을 했다면 진보언론을 포함한 많은 언론들이 전혀 받아쓰지 않았는지, 왜 그 이후 경쟁후보를 비롯한 그 누구도 이를 문제삼지 않았는지, 여론에 민감한 당은 왜 아무 문제삼지 않았는지 합리적으로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떳떳합니다.

6. 선거때는 아닌 굴뚝에 연기나고 실제로 없던 일도 만들어집니다. 이번 일도 악의적 프레임에 해당되는 일이며 이현웅은 앞으로도 이현웅답게 당당하게 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4. 정치 활동

원래 시민사회활동을 하다가 2012년 손학규 대표의 권유로 민주통합당에서 처음 정치를 시작하였다. 당시 살고 있던 부평은 손학규 대표가 홍영표 의원을 지지할 것이라는 계산에 남동구 을 출마를 권유받았고, 남동구 을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했지만 컷오프되고 정치초보의 비애를 온몸으로 체감하였다.[7]

2014년 새정치연합 창당을 준비하던 안철수 그룹에서 인천시당 창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그러나 안철수 대표의 합당 결정으로 민주당에 복당하려 하였으나 당 사무처에 의해 탈당 1년이 안 되었다는 이유로 복당이 거부되었다. 해당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새정치연합 창당을 위한 것이었고 창당발기인까지 하였음에도 당 사무처에 의해 입당을 거부당했다. 이 때 민주당의 패권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복당을 포기하고 무당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였다.

2016년 국민의당 창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태어나고 자란 부평 을 지역에서 출마하기로 생각하고 2015년 12월 25일부터 거리 명함 배포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5%의 지지율에서 선거일 당일에서는 24.95%의 최종지지율로[8] 단기필마로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 국민의당 당원은 지역구 내에 100명 정도였고 수십 배의 당원과 지지자를 가진 새누리당 강창규 후보와의 득표율 차이도 6.32% 정도였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부평구의 비례대표 득표율 30.63%로 민주당, 새누리당을 제치고 1위였으며,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지지세가 높아져 선거가 일주일만 후에 치러졌으면 더 높은 성적을 얻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24.95%의 득표율로 선거 데뷔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후, 중앙당에서 국민소통본부 부본부장으로 임명되고 디지털소통위원장(부총장급)으로 임명받는다.[9] 디지털소통위원장으로 재직하며 “정치자금으로 본 문재인 안철수 지출비교” 등의 카드뉴스로 문재인 지지자에게 있어 미운 놈으로 찍히게 된다. 더구나 엠엘비파크에 “국민의당 이현웅입니다”라고 올린 글이 최다댓글, 최고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일약 엠엘비파크의 유명 인사로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하고, 다시 조직을 정비해야 해 이태규 총장이 정치경력이 있는 적절한 조직위원장(부총장)을 찾았는데 이현웅이 적합하다는 여러 의원의 추천이 있어 조직부총장으로 임명되어 조직 정비 작업을 담당하였다. 조직부총장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당무에 참여하게 되었고 당 조직에 대해 이해도도 높혔다.

그 후 바른미래당 당규제정위원을 하면서 바른정당 전현직 의원들의 인정을 받아 바른미래당에서도 국민의당측과 바른정당측의 동의를 받아 조직부총장을 하게 되었다. 당시 사무총장인 오신환 의원과는 동갑으로 서로 친하게 지냈다.

바른미래당이 호남세력과 합당해 민생당으로 통합되면서 그과정에서 안철수 대표가 창당한 2기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21대 총선에서 국민의당 소속으로 비례대표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20대 대선 합당을 전제로 한 윤석열-안철수 단일화 과정에서 이학재 의원과 공동유세를 하는 등 합당에 교두보 역할을 했다. #

합당 이후 국민의힘 인천광역시당 지방선거 공천관리위원을 역임했으며 제8회 동시지방선거 유정복 인천시장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당선에 기여했다.

뛰어난 경쟁력을 인정받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부평구 을 지역에 전략공천을 받았다.

5. 여담

변호사 초기에 선배가 “너도 돈 좀 벌면 서울로 이사 갈 거냐?”라고 물었던 질문에 “제가 일평생 부평 살겠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평생 인천에서 이사 가지는 않고 아이들도 인천에서 키우겠습니다”라고 답하고 이를 지키고 있다. 54년 인생에서 인천을 떠났을 때는 군복무 시절 2년과 신혼 초 서울 로펌에서 근무할 때 서울에서 1년 전세 산 것 이외에는 없다.

신혼 초 잠시 몇 개월 동안 서울 로펌에서 활동한 이외에는 24년간 고향인 인천에서 사무실을 열고 지금도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6.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부평 을

[[국민의당(2016년)|
파일:국민의당(2016년) 흰색 로고타입.svg
]]
31,240 (24.95%) 낙선 (3위)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국민의당(2020년)|
파일:국민의당 흰색 로고타입.svg
]]
1,896,719 (6.79%) 낙선 (18번)
2024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부평 을

53,487 (38.75%) 낙선 (2위)

7.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민주통합당|
파일:민주통합당 연두 로고타입.svg
]]
2012 - 2013 정계 입문


[[민주당(2013년)|
파일:민주당(2013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13 - 2014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4 탈당[10]



(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4 창당준비위원회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4 - 2016 신당 합류 거부


[[국민의당(2016년)|
파일:국민의당(2016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16 - 2018 창당


[[바른미래당|
파일:바른미래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8 - 2020 합당[11]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20 탈당[12]


[[국민의당(2020년)|
파일:국민의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20 - 2022 창당


2022 - 현재 합당[13]


[1]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개동 [2] 43회 졸업 [3] 2회 졸업 [4] 15회 졸업 [5] 고등학교에서는 등록 후 재수를 권했지만 본인이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6] 비교적 짧은 시간에 합격하였는데 민법 고득점에 힘입어 사시 합격 점수는 상위 200등 안쪽이었다고 한다. [7] 당시 처음 선거를 준비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함. [8] 국외 국민투표에서는 많이 낮았다. [9] 디소위는 각종 SNS를 관할하며 이후 대선과 지선에서 사이버 선거의 일선에 나선다. [10] 새정치연합 합류를 위한 탈당. [11] 바른정당과 신설 합당. [12]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3] 국민의힘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