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李淸照중국 송나라의 시인. 정강의 변 전후에 활약한 여류시인으로, 이안거사 (易安居士)라 불리며 본인과 국가의 불행에 대한 애조 섞인 시조를 지었다. 그녀의 시는 송사(宋詞) 중에서도 수준급으로 평가되며, 한족 민족주의의 상징 중 하나이다.
2. 생애
1084년 (혹은 1081년) 산동성 제남 (현 지난시)의 학자 집안 출신으로, 부친 이격비 (李格非)는 대문호 소식의 애제자로써 당대의 명사였다.[1]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조예가 깊던 이청조는 18세에 당시 태학에 다니던 명문가 자제인 조명성 (趙明誠)과 결혼했다. 당대의 풍습대로 둘은 아직 어리고 생면부지였지만, 비슷한 관심사 덕에 함께 책을 저술하는 등 행복한 신혼을 보냈다. 이들은 선결혼 후연애의 본보기로 여겨졌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12세기 초엽 송나라 정치계를 휩쓴 구법당과 신법당 간의 당쟁인 원우당(元祐黨)에 이청조의 본가와 시가가 서로 반대편에 서며 고난이 시작됐다.스승과 마찬가지로 구법당에 속했던 이격비는 원우당적비에 이름이 오른 300여인의 적폐 인사 중 하나로써 탄핵되고 투옥되었다. (1102년) 한편 시아버지 조정지는 그러한 탄핵에 압장선 대가로 재상에 올랐다. 이청조는 조정에 심금을 울리는 상소를 올려 부친을 석방시켰지만, 무너진 가문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또한 사랑하는 남편이 연이어 지방관에 임명되며 떨어죠 있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청조는 자신의 신세 한탄을 시에 담았다. 그나마 금석학에 조예가 깊던 남편의 금석록 집필을 도우며 마음을 달래던 1129년, 정강의 변의 혼란 중에 호주 (현 후저우시) 지부 (知府)로 임명되어 임지로 향하던 조명성이 건강(현 난징시)에서 병사하자 이청조의 슬픔은 극대화되었다.
피란을 가며 일부만 챙겨온 금석문과 고서화를 대부분 잃은 것도 슬픔의 일부였다.[2] 이러한 고난기에 그녀의 대표작인 영우락, 성성만 등이 지어졌다. 1132년 이청조는 주변의 비판에도 피란 당시 도와준 조명성의 친구 장여주(張汝舟)와 50세의 나이로 결혼하지만 성격 차이로 1달 만에 이혼한다.[3] 동시에 남송 정권이 금나라와 화의를 맺은 등 중원 수복에 실패하고 강남(중국)에 안주하자, 악비를 지지하던 이청조는 조정의 무능함과 부패에 분노를 표출하며 사회 참여적인 시를 짓기도 한다. 시대적, 개인적 불행을 시에 표현하던 그녀는 항주를 거쳐 동생 이항에게 의탁하다가 1151년 향년 67세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