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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광그룹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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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39758><colcolor=#ffffff> 태광그룹 초대 회장 이임용 李壬龍 | Lee Eam-y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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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1년 5월 7일 |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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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6년 11월 2일 (향년 75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경주 이씨 |
호 | 일주(一洲) |
직업 | 기업인 |
학력 |
청하공립보통학교 (졸업) 쓰쓰이 실업학교 (졸업) |
부모 | 아버지 이우식 어머니 정막랑 |
형제자매 | 3남 1녀 중 삼남 |
배우자 | 이선애 |
자녀 |
장남 이식진 (1948 ~ 2003) 차남 이영진 (1951 ~ 1994) 장녀 이경훈 (1954 ~ ) 차녀 이재훈 (1956 ~ ) 삼녀 이봉훈 (1958 ~ ) 삼남 이호진 (196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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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태광그룹 초대 회장.2. 생애
1921년 5월 7일, 경상북도 영일군(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서 태어났다. 청하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가서 나고야시 쓰쓰이 실업학교를 졸업하였다.귀국하여 일선 공무원으로 일하다 1954년 태광그룹의 모체 태광산업을 창업했다. 이후 흥국생명 등이 포함된 태광그룹으로 기업을 성장시켰다. 1977년 학교법인 일주학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이 되었다.
이임용 창업주는 야당 거물이던 이기택 전 총재와 처남-매부지간이란 이유로 군사정권 시절 여러차례 세무조사를 받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처남이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게 이 창업주에게는 결코 득이 아니었던 셈[1]이다. 그는 “기업은 절대 정치와 연결돼선 안 된다.”며 사업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찍히면 죽던 서슬퍼런 군사정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정경 분리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베테랑 세무조사 요원들을 투입, 몇 날 며칠을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타계한 이임용 창업주의 근검절약과 소탈함은 재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타계하기 전까지 이임용 창업주가 살던 서울 장충동 2층 양옥집은 아내 이선애 여사가 사망할 때까지 살고 있었다. 이 집에는 30∼40년 된 옛 가구들이 그대로 있다. 회사 관계자는 “현대 정주영 회장에 버금갈 정도로 검소했다.”고 이 창업주를 회고한다. 그는 해외이든 국내이든 출장길에는 새로 지은 고급 호텔을 이용하는 법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 십년 동안 단골로 다닌 낡은 호텔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점심도 설렁탕 한 그릇으로 후다닥 끝낼 정도로 무척 소탈했다.
여담으로 태광그룹은 무차입 경영을 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이 창업주는 “은행돈을 빌리면 토·일요일 등 은행이 쉬는 동안에도 이자는 불어난다.”며 무차입 경영을 추구했다. 돈을 빌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지도 않았다. 번 만큼 투자한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매출 규모 1조 3000억원인 모기업 태광산업의 부채 비율이 거의 제로인 것도 이같은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 절약 경영과 남의 돈을 빌려 쓰지 않고 수익만큼 투자하는 실속경영은 그룹을 더욱 튼튼하고 알차게 만들었다. 인수한 부실기업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건실한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임용 창업주는 또 외부에서 전문경영인을 영입하지 않고 공채 출신을 키워 경영진으로 기용했다. 기획력과 업무 추진력을 인정받은 그의 처남 이기화는 이 창업주의 사후 태광그룹 회장에까지 올랐다. 또 공채 출신인 류석기·강석명·최운형 등이 중용됐다.
배구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는데 1970년에 대한배구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1970년부터 1977년에는 한국실업배구연맹 회장을 지냈다. 1971년 태광산업 산하에 여자배구단을 직접 창단하게 되는데[2] 이것이 오늘날의 흥국생명 여자배구단이다.[3]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청소년 여공들의 복지 차원에서 태광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설립했으나 이임용 회장 사후에 폐교가 확정되어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4]
다만 한계점도 존재하는데, 유언장에는 부인인 이선애 前 이사와 3명의 아들들에게만 유산을 상속하라고 적어두면서, 사망 후 20년이 지나 딸과 아들의 유산 분쟁의 씨앗을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특히 회장이 된 3남 이호진의 각종 논란들을 생각해보면 자녀 교육에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에 대해 의문도 든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가 사망한 지 13년이 지난 2009년 11월 이임용 회장의 묘지가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범인은 이틀만에 붙잡혔다. 심지어 해당 범인은 과거 1999년 롯데그룹 명예 회장 신격호의 선친의 묘를, 2004년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의 조부모의 묘를 도굴해 두 차례나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전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