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인 전 통일부차관에 대한 내용은 이봉조(공무원)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봉조 李鳳祚 | Lee Bong-j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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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80><colcolor=#fff> 본관 | 장수 이씨[1] |
출생 | 1931년 5월 1일 |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2] | |
사망 | 1987년 8월 31일 (향년 56세) |
서울특별시 | |
학력 |
진주중학교(졸업) 진주고등학교(졸업) 한양대학교 ( 건축학과 / 학사) |
배우자 | 첫번째 부인 노전숙, 사실혼 관계 현미 |
자녀 | 슬하 3남 3녀[3] |
종교 |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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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작사가, 작곡가이다. '한국의 스탠 게츠'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2. 생애
1931년 5월 1일,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은 진주시에서 자랐는데, 일찌감치 미국 재즈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대한 흥미를 키워 갔다고 한다. 진주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시절, 친구의 권유로 미8군에서 음악 활동을 하게 됐다. 거기서 재즈 색소폰을 연주했는데 뛰어난 실력을 인정 받으며 전국에서 공연을 갖게 되었다. 이 시절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동기들의 말에 따르면 수업 내내 졸았다고 한다. 아마 밤에 미군 부대에서 공연하면서 생긴 피로로 인한 듯 하다. 여기서 받은 양담배를 친한 친구들에게 한 가방 들고 와서 뿌렸다고... 이후 서울특별시청 토목과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미8군 무대에서 재즈 색소폰을 연주했다. 당시 유명 색소포니스트인 엄토미[4]의 제자로서 인정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결국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재즈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내연녀였던 현미와 함께 수많은 명작을 내놓으며 명성을 떨쳤다. 애초에 1957년 현미의 미 8군 무대 데뷔곡이었던 '아 목동아!'를 번안 편곡한 사람이 이봉조였다. 1962년 현미의 1집 앨범인 '밤안개'가 공전 히트를 기록하면서 파트너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그밖에도 정훈희, 윤복희, 김추자 같은 유명 가수들을 발굴하며 스타 작곡가로서 맹활약하였다.
1963년,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가정교사'. 그리고 1964년 영화음악 연출가로서도 데뷔하였고, TBC가 개국하면서 전속 관현악단장으로 활동했으며, 1967년에는 영화음악 연주감독으로 데뷔했다. 훗날 여러 국제가요제에서도 작곡가로서 본인의 이름을 알렸다. 본처인 노전숙과 자녀들이 모두 개신교 신자여서인지 색소폰 연주곡 CCM 음반도 다수 출판했다.
보통 작곡가들은 즉흥곡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봉조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맨발의 청춘이 그랬다. 촬영 기간이 18일에 불과했기에 작곡할 시간이 워낙 없었는데, 이봉조가 촬영 화면을 보고 녹음실에서 색소폰으로 몇번 ‘빠앙빠앙’ 불다가 주제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게다가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크리스마스와 신정 때 친필로 써 보낸 그의 카드는 작품 수준으로 평가 받았다.
2.1. 결혼 생활
노전숙과 열애 끝에 결혼했으며 슬하에 1남 3녀를 두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 본부인 몰래 가수 현미를 만나 동거하게 된다. 이후 본부인인 노전숙과 가수 현미는 각각 아들을 임신할 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현미의 첫째 아들과 노전숙의 셋째 아들이 동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외도가 들통나면서 가정 파탄에 이를 지경이 되었다. 이봉조는 현미에게 이혼서류를 보여주면서 안심시킨 반면에 혼인신고를 계속해서 미루면서 지속적으로 두집 살림을 해왔다. 허나 이혼서류마저 가짜였다고 한다. #결국 한 팬의 전화로 이봉조가 지속적으로 두 집 살림을 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미는 15년 만에 별거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흥분한 이봉조가 다 같이 죽자며 칼을 들고 쫓아왔다고 한다. 사실 1960년대에는 비교적 종종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이혼사유 1위가 (그것도 매우 압도적이었다) 부정행위 또는 두집 살림인 것을 보면... 당시에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 적령기 남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고 사회 전체적으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남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여자들이 후처도 마다하지 않았다.
절친이었던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중재로 큰 분쟁으로까진 발전하진 않았지만, 이후 부인이 있는 본가로 들어가지 않고 쭉 홀로 살다가 1987년 8월 3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현미와 재회해서 다시 합치기로 했으나 이봉조의 사망으로 재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회 당시 틀니를 끼고 색소폰을 부는 이봉조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현미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본부인인 노전숙 사이에서 낳은 4남매는 모두 훌륭히 성장하였다. 다들 명문대를 졸업하였고 외모도 출중하다. 아들 이영대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재학중인 22세에 제26회 사법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한 뒤 하버드대 로스쿨 유학을 가서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 현재는 서초동 소재 법무법인 수호의 대표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게다가 광고도 찍을 정도로 미남이다. 이화여대 출신 엘리트인 노전숙처럼 딸들도 명문 이화여대, 숙명여대를 졸업해 의사, 교수, 대기업 임원과 결혼하였다.
사망 이후 이봉조의 가족들이 이봉조 본인이 끝내 본부인 노전숙과의 합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합장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부인의 자녀들이 요구했고 현미 측의 배려로 합장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