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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1:06:56

이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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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동화(1907).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키코 토카(木子東華)
두산(斗山)
출생 1907년 1월 12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화천리 560번지
(現 평양시 승호구역 화천1동)
사망 1995년 1월 10일 (향년 87세)
경기도 안산시 일동 546-3번지 자택
학력 야마구치 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 정치학 / 학사)
종교 가톨릭
묘소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 혜화동 성당 포천묘원
상훈 건국포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정치인, 언론인이다.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07년 1월 12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화천리 560번지(現 평양시 승호구역 화천1동)에서 태어났다.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가 세이세이코 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이후 야마구치고등학교(現 야마구치대학), 도쿄제국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도쿄제국대학 재학 중이던 1935년 독서회에 참여했다가 당시 '신사상'이라 불리던 사회주의 국제정치 외교, 경제 문제 등을 접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1936년 3월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으며, 이후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성북정(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86-3번지에 주소지를 두었다. 1938년 1월 중앙불교전문학교(現 동국대학교)의 정치학 담당 교수로 임용되었다. 1940년 4월부터 그해 6월까지 조재옥(趙載鈺)의 권유로 교내에 비밀결사 경성 콤그룹 산하 학생부의 하부 조직으로 지하 항일연구독서회를 설치하고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사회 건설 이론을 지도했다.

1941년 4월에는 자신의 하숙집에서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김한성(金漢聲)으로부터 '국제 정세가 긴박해지면서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며, 이 정세에 호응해 혁명 운동에 참여하라'는 말을 들었고, 이 말에 승낙했으나 이 사실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1941년 9월 이후 경성 콤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에 곧 체포되어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오랜 기간 고문 및 취조를 당한 뒤 1943년 1월 병보석으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출옥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43년 10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육·해군형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합의부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이후 1년간 미결수로 투옥되어 있다가 1944년 9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조언비어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받아 곧 석방되었다.

폐결핵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들어와 독일어 원전으로 이마누엘 칸트 형이상학 서설,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 등을 읽었다. 이후 러시아어를 공부하라는 친구의 조언을 받아 러시아어를 3달 동안 독학 후 레닌, 플레하노프의 저서 등 사회주의 원서를 탐독하였다.

이후 이화여자전문학교 부속병원 사무장으로 있으면서 여운형 건국동맹에 참여하였다.

8.15 광복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중앙집행위원회 서기국 서기를 지냈다. 이후 조만식이 사장으로 있던 평양민보의 주필이 되었다. 월남한 뒤 경북대학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사상계에 꾸준히 글을 발표한다. 이후 50대에 사상계의 기자와 결혼하게 된다.

1957년 서상일 등과 함께 민주혁신당을 창당하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1960년 사회대중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무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조일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995년 1월 10일 오후 7시에 경기도 안산시 일동[1] 546-3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대구시 무[2]
7,152표 (19.47%) 낙선 (2위)

[1] 2002년 11월 1일 상록구가 신설되자 이에 편입되었다. [2] 제5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