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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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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후의 의자왕 |
1. 개요
KBS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의 등장 인물로, 이진우[1]가 맡았다. 극중 백제 측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치 향락의 대명사이자 폭군으로 간주되는 의자왕과는 다르다. 즉위 전에는 예의가 반듯하며 매우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을 보여주는데다 부왕인 무왕 못지않게 정치적인 식견 또한 높은 '해동증자'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었고, 즉위 후에는 그야말로 사서에 기록된 재위 초 폭풍간지 의자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까지 의자왕을 다룬 미디어들 중 가장 실제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 극중 행적
태자 시절에는 신라와의 친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우호적 입장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춘추가 주선한 덕만 공주와의 회동을 통해 화평을 약속했고, 이 때문에 김춘추의 이상에 동조하여 신라에 대한 강경책을 펼치는 아버지 무왕에게 간언하기도 했다. 무왕과 승만왕후의 거래를 알게 되자 처음엔 김춘추의 뒤통수를 쳤으나 후일 백제가 승만왕후와 거래가 있었음을 김춘추에게 알려주기도 했다.그러나 무왕의 명으로 신라 영토로 결사대를 끌고 들어왔다가 비담의 간계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겪고난 뒤에는 신라와의 화평을 포기하고 신라를 멸망시키기로 작심하게 된다. 김춘추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토록 추진하던 화평이 조정과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어 억울하겠으나, 의자왕 입장에서는 신라의 통수로 여러 번 곤경에 빠졌으니 입장을 바꿔도 할 말이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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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비담의 난으로 신라가 혼란스런 정국으로 들어서자 비담과 김춘추 중 누가 용상에 올라야 백제에게 유리한지 저울질을 하면서, 김춘추가 용상에 오르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신라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강행하지는 않고 사태를 관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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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당 동맹으로 당나라를 끌어들이는 김춘추를 매우 우습게 보고 자만에 빠졌고, 자신에게 간언을 하는 태자 부여융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폐위시키는 등 판단력이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말년에 암군으로 변신하여 아첨하는 신하들의 말만 듣고, 충언을 간언하는 흥수와 성충도 쫓아낸다.
결국 나당 연합군의 대대적 공세가 터지자 이를 막으려 했지만 백강에서 당군에게 패했고, 계백도 김유신에게 패하자 웅진성으로 도망쳤으나 이어지는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전의를 상실했다.
결국 김춘추와 소정방에게 항복하고 역사에서처럼 김춘추와 소정방 등에게 술을 따르는 치욕을 겪으나, 김춘추와 김유신, 김법민에게는 그냥 정상적으로 따라주지만 소정방에게는 고의로 술을 넘치게 따라서 소정방의 옷을 술로 적시게 한다. 그리고 화가 난 소정방에게 밀침을 당하기까지 한다. 이후엔 자포자기한듯, 백제의 저항 세력에게 항복을 설득할 것을 종용하는 김춘추에게 자신은 망국을 막지 못한 자이니 백제 백성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며 체념한다.
이후 60회에서 당으로 압송되던 중에 병을 얻게 되는 장면이 나오고, 당나라 황궁의 대전에 끌려가 당 고종 앞에서 사면령을 받던 도중 피를 토하고 쓰러져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660년, 의자왕과 태자 효를 비롯한 왕족과 신료 90여 명과 백제 백성 12,807명이 당군의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다. 끌려간 백성 12,000여 명은 대부분 백제의 뛰어난 기술을 가진 장인이거나 학자, 문인, 궁인들로 추정되는 데, 이들이 당으로 떠난 후 백제의 찬란한 문화는 다시 꽃피울 기회를 잃고 삼한에서 그 자취가 희미해졌다.
당 고종은 의자왕을 엄히 꾸짖은 뒤, 백제 정벌의 승전을 축하하는 뜻으로 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백제 패망의 충격으로 병을 얻은 의자왕은 당으로 압송된 얼마 후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당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위위경을 추증하고, 장례를 치른 후 비를 세우게 했다고 전해진다.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태자 시절 해동증자라 불리며 삼한은 물론 중원과 왜에 이르기까지 그 명성을 떨쳤던 의자왕은 20년의 재위 기간 동안 신라의 김춘추, 고구려의 연개소문 등과 삼한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뤘지만, 말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성충 같은 충신을 멀리하고, 망회루 등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짓는 데 국고를 탕진하여 민심을 잃고, 결국 나당군의 공격에 도성이 함락당하며 건국 678년 만에 패망한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었다. 시호도 얻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병사한 의자왕의 시신은 낙양 북망산에 묻혀있다고 전해진다.
백제의 멸망과 의자왕의 최후
당 고종은 의자왕을 엄히 꾸짖은 뒤, 백제 정벌의 승전을 축하하는 뜻으로 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백제 패망의 충격으로 병을 얻은 의자왕은 당으로 압송된 얼마 후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당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위위경을 추증하고, 장례를 치른 후 비를 세우게 했다고 전해진다.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태자 시절 해동증자라 불리며 삼한은 물론 중원과 왜에 이르기까지 그 명성을 떨쳤던 의자왕은 20년의 재위 기간 동안 신라의 김춘추, 고구려의 연개소문 등과 삼한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뤘지만, 말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성충 같은 충신을 멀리하고, 망회루 등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짓는 데 국고를 탕진하여 민심을 잃고, 결국 나당군의 공격에 도성이 함락당하며 건국 678년 만에 패망한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었다. 시호도 얻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병사한 의자왕의 시신은 낙양 북망산에 묻혀있다고 전해진다.
백제의 멸망과 의자왕의 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