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배경
밴들 시티 외곽에는 녹음으로 뒤덮인 한 골짜기가 있었다. 숲에는 달빛나방이 반짝였고 강가에는 무지갯빛 물고기들이 넘쳐났다. 푸르른 나무 사이, 작은 집에는
요들 마법사 노라와 그녀의 고양이 유미가 살고 있었다. 유미는 보호 마법의 능력을 지닌 채로 태어났다. 덕분에 심심할 때면 햇볕을 쬐고 지칠 때면 나무 그늘 밑에서 낮잠을 청하는, 나름대로 안락한 묘생을 보낼 수 있었다. 이따금 모험심이 동할 때면 주인을 따라 물질 세계와 영혼 세계를 탐험하기도 했다. 노라는 주로 이상한 물건을 수집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사실 물건이라고 해봤자 깨진 잔이나 색이 입혀진 유리 조각, 또는 우스꽝스러운 자수가 새겨진 천 조각들이 대부분이었다. 물건을 살펴볼 때면 주인의 태도가 사뭇 경건해지긴 했으나 유미로서는 여전히 물건의 용도를 알 수 없었다. 유미는 그저 마법으로 노라를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고, 집에 도착하면 주인의 발치에서 온기를 보탰다. 차원문은 좀처럼 쉽게 열리지 않았는데, 설사 열리더라도 상태가 불안정한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이건 솜씨 좋은 고양이라도 딱히 해결책은 없는 문제였다. 이따금씩 유미는 요들들이 며칠 동안 차원문을 기다리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요들들은 특정한 아치와 동쪽 별이 정렬되길 기다리거나 늪지 백합 사이를 거닐며 진흙 속에서 피어오르는 은빛 꽃봉오리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이렇듯 많은 수고를 들인 후에야 차원문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문의 서'라는 마법서를 지니고 있던 노라는 마법서에 그려진 곳이라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차원문을 열고 빛나는 종이로 뛰어들기만 하면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달했다. 물론 차원문을 통과하면 뒤이어 마법서도 저절로 따라왔다. 사실 유미는 관문의 서 자체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별빛조차 보이지 않던 어느 밤, 깡총불과 함께 달빛나방을 쫓으며 놀다 집에 돌아와 보니 주인이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급히 책상 위에 놓인 마법서를 펼쳤지만, 중간중간 페이지가 완전히 찢겨나간 흔적이 보였다. 제목을 읽지 못했기에 유미는 다급히 관문의 서를 '책'이라 불렀다. 목소리에 반응한 듯 관문의 서가 꿈틀거렸다. 유미는 팔랑이는 종이를 통해 마치 책의 생각이 읽히는 듯했다. 비록 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책의 목소리는 점점 뚜렷해졌다. 마침내 유미는 노라가 매우 위험한 장소로 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떠나면서 차원문을 파괴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노라를 구하기로 결심한 유미는 책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천여 장에 달하는 관문의 서는 페이지마다 마법의 통로가 존재하여 물질 세계와 영혼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역할 했다. 노라가 사용한 페이지는 찢겨 있었지만 책의 도움으로 가까운 장소로 이동하는 건 가능할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유미와 책은 가능성이 있는 모든 차원을 탐험해야만 했다. 본의 아니게 책의 소유자가 되어버린 유미는 사자와 같은 용맹함으로 관문의 서를 지키기로 맹세했다. 만에 하나라도 마법서가 잘못된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가는 온갖 불경하고 탐욕스러운 존재들이 밴들 시티를 덮칠 것이다. 이렇게 낯설고 위험한 차원을 탐험하는 유미와 책의 고된 여정이 시작되었다. 유미는 노라의 냄새를 쫓으려고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물론 고양이답게 간혹 노라 대신 쥐를 쫓기도 하고 피곤하면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에 반해 책은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편이었고 불만 또한 많았다. 시간을 낭비한다고 투덜대거나 혹시나 모를 적의 공격을 걱정하며 항상 불안에 떨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같았다. 바로 자신의 주인을 찾는 것이었다. 유미는 특히 노라가 그리울 때마다 다른 친구들을 찾곤 했다. 그중 두꺼운 수염과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낮은 웃음소리를 가진 양치기[1]는 유미가 좋아하는 친구였다. 유미는 양치기의 어깨에 기대어 쉬다가 우박 폭풍을 일으키는 눈의 정령들로부터 그를 보호했고, 그는 유미에게 꿈틀대는 물고기를 잡아다 주었다. 유미는 마침내 방대한 슈리마의 폐허 속에서 주인의 냄새를 찾아냈다. 모래 속 깊은 곳을 파던 유미는 노라가 사용하던 찻주전자의 일부로 보이는 깨진 푸른색 도자기 조각을 찾았다. 땅을 더 파려고 하자 포악한 짐승이 지면으로 솟아올랐고, 유미와 책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런 짐승이 발톱으로 책장을 찢는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유미는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유미와 책 사이의 우정은 예상 밖의 것이었지만, 그들은 노라를 향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공유하며 빠르게 친구가 되었다. 유미는 이곳저곳에서 노라의 흔적을 계속 찾으러 다니며 따사로운 햇볕 아래 그녀의 곁에서 낮잠을 청하던 날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
2. 고기고기물고기야
'내 주인인 요들 노라는 내 친구 '책'에 얼굴을 파묻고 코를 골고 있었어. 열린 창문 사이로 달빛나방 수십 마리가 마치 풍등처럼 빛을 내며 들어왔고, 나는 꼬리를 흔들며 즐겁게 하늘로 뛰어올랐지. 딱히 나방을 잡으려는 건 아니었지만, 난 점점 높이 뛰어오르며 주위로 떠다니는 달빛나방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어.' '그때 달빛나방 한 마리의 몸이 뒤틀리더니 고등어 모양으로 변했어. 곧이어 주위에 있던 다른 나방들도 전부 물고기로 변했지. 물고기들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데 갑자기 세상이 뒤집혀버리는 게 아니겠어? 선반에서 떨어진 책들이 큰 소리를 내며 천장으로 쏟아졌고, 내 주인 노라도 잠든 채 공중으로 떨어졌어. 우리 몸이 위로 떨어지는 동안 물고기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녔지.' 난 졸린 눈을 깜빡이며 나무 상자 안에서 깨어났어. 상자 널판 사이로 달빛이 비쳤지. 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왔더라? 그래. 군침 도는 생선 비린내를 맡으니 기억이 났어. 빌지워터 거리를 방황하다가, 말린 물고기가 가득한 상자를 발견하곤 배가 터질 때까지 먹다가 잠이 들었지? 다시 잠들려고 하는데, 내 배가 요동쳤어. 그리고 난 옆으로 쓰러졌지. 마치 꿈처럼, 내 위로 수십 마리의 말린 물고기가 쏟아졌거든! 내 배에선 가르랑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 책은 떨어지는 물고기를 피하려고 구석으로 갔어. 책장에 음식이 묻으면 안 된다고 언제나 눈치를 줬거든. 난 '마른 나무'에서 생선 비린내가 나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마른 나무'에 대해선 책이 더 잘 아니까 그냥 내버려 뒀어. 난 상자 틈 사이로 밖을 내다봤어. 바닥에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멀리선 달빛이 일렁였지. 그래, 여긴 바다였어! "책아, 대체 왜지?" 난 소리쳤어. "낮잠을 자면 절대 나쁜 일이 안 생기는데!" 책은 화가 났는지 펼쳐졌다가 다시 덮였어. 나처럼 책도 물을 싫어했거든. 난 겁이 나기 시작했어. 책은 바스락 소리를 내며 날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 절망에 빠진 난 나무 상자를 발톱으로 긁다가 실수로 말린 물고기를 찢어버렸어. 바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까지 망치게 하는, 물 중에서도 최악의 물이야! 난 책 표지에 발을 대고 서리가 낀 차원문이 있는 책장을 폈어. 온통 물밖에 없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말이야. 어디로든 도망가야 했어. 추운 곳이라도 상관없었지. 책의 차원문으로 뛰어들려던 순간, 딸랑이는 종소리와 빛나는 무지개와 같은 비명이 들렸어. 내 털이 곤두서게 하는 소리였지. 바로 요들의 비명이었어. 난 상자의 틈 사이로 인간 선원 두 명이 푸른색 털이 난 요들 하나를 끌고 갑판 끝으로 가는 걸 지켜봤어. 선원 중 하나는 턱에 까만 수염이 나 있었고 다른 녀석은 뚱뚱했는데, 둘 다 히죽히죽 웃고 있었지. 두 사람 발치엔 작살과 낚싯대, 창, 두꺼운 낚싯줄 타래가 밧줄로 묶여 있었어. 그들은 심해 괴물 사냥꾼들인 게 분명했지. "이 녀석으로 근사한 큰주둥이고기를 낚을 수 있겠지?" 선원 하나가 말했어. "큰 물고기들은 요들 고기를 좋아한다던데." 뚱뚱한 선원이 대답했어. "시도해본 적은 없어. 빌지워터 근처엔 요들이 별로 없거든." 파란색 요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어. "난 미끼가 아니야! 부탁이야, 제발 풀어줘!" 요들은 쇳소리를 내며 소리쳤지만, 선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 그때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니 상자가 흔들렸어. "물고기가 왔나 보군. 이제 큰주둥이고기를 낚아보자고!" 턱에 수염이 난 선원이 웃으며 말했어. 하지만 난 녀석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 거대한 지느러미가 배 주위를 맴돌자 사자만 한 물결이 배를 강타했어. 그때 책이 날 잡아당겼지. 들키기 전에 차원문을 타고 이 물 지옥에서 도망치자는 뜻이었겠지만, 난 요들의 비명을 모른 체할 수 없었어. 난 상자 틈 사이로 앞발을 넣어 걸쇠를 열었어. 노라가 행방불명된 이 마당에 또 다른 요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거든. 선원들은 바다를 휘젓는 지느러미를 바라보느라, 내가 날쌘 호랑이처럼 조용하게 상자에서 뛰어내려 자기들 뒤로 움직이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어. 가엾은 요들은 바다 쪽을 향해 매달린 기다란 낚싯대에 묶여 있었고, 요들 아래 바닷물에선 거품이 일었지. 물은 언제 봐도 끔찍하다니까! 내가 작살 더미 위로 뛰어오르자, 책도 긴장한 채 책장을 펄럭이며 내 옆으로 날아왔어. 그때 선원들이 우리를 알아챘지. "저거 보라색 너구리랑... 날아다니는 책인가?" 선원 하나가 물었어. 그러자 다른 선원이 대답했어. "일기장을 가지고 온 새끼 곰 같은데?" 그때 또 다른 선원이 말했지. "이 바보들아, 그냥 고양이잖아. 어서 잡아!" 선원들은 우릴 향해 달려들었지만, 난 재빠르게 놈들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어. 그리고 마법 밧줄을 풀어서 녀석들의 다리를 묶었지. 그랬더니 마치 탁자 위의 컵처럼 쓰러지는 게 아니겠어? 난 낚싯대 옆 난간에 올라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어. 아래쪽에서 소용돌이치는 파도는 내 사냥 본능을 발동시켰지. 곧 뭔가 덮쳐올 게 분명했어. "날 풀어줘!" 낚싯대에 묶인 요들이 소리쳤어. "난 미끼가 아니야.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 요들 녀석, 참 운이 좋았지. 난 물은 싫어했지만 물고기는 하나도 안 무서웠거든. 나는 낚싯대 위로 뛰어올랐어. 공중에 떴을 때 고양이의 시간은 가끔 천천히 흐르고는 하지. 난 팬케이크처럼 네 발을 벌린 채 끔찍한 바닷물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내 털이 흩날리는 걸 느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요들을 구하겠다고 다짐했어. 이미 뛰어올라서 돌이킬 수 없기도 했고. 난 소리쳤어. "걱정하지 마, 파랗고 작은 요들아! 내가 구해줄게!" 내가 요들의 어깨에 착지했을 때, 책이 바로 뒤따라왔어. 요들과 내 운명은 이제 서로 얽히게 됐지. 요들에 내 체중까지 더해지자 낚싯대가 떨리기 시작했어. 그때 배 크기의 3분의 1만 한 물고기가 입을 벌린 채 바다에서 뛰어올랐어. 입안에는 수백 개의 이빨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지. 지금까지 봤던 물고기 중 가장 큰 녀석이었어. 턱은 소 두 마리를 씹지 않고 삼킬 정도로 거대했고, 깡총불에 비친 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비늘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지. 그리고 거대한 큰주둥이고기는 나, 요들, 책 그리고 낚싯대까지 통째로 집어삼켰어. 물고기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자 우리는 입천장에 부딪혔어. 입안은 칠흑같이 깜깜했고, 썩은 생선 냄새가 진동했지! 난 물고기가 우릴 삼키지 못하도록 마법 방울로 우리 몸을 감싸 목구멍에 걸리도록 했어. 그리고 깡총불을 켜자 눈앞에 심하게 썩은 이빨이 보였지. 왜 썩은 냄새가 났는지 알겠더라고. 이빨을 본 요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어. 물고기가 몸부림치자 우리 셋은 사방으로 나뒹굴었지만, 마법 방울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지.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방법치고는 참 특이하지? 난 탈출하기 위해 책을 펴려고 했지만, 큰주둥이고기가 다시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바람에 우리는 방울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된 채 떠밀렸어. 그리고 큰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지. 아마 물고기가 갑판 위에 올라간 것 같았어. 거대한 큰주둥이고기가 꼬리를 휘두르며 몸부림치자, 선원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지. 뒤이어 뭔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어. 첨벙, 첨벙, 첨벙하고 말이야. 인간들이 바다에 빠진 게 분명했어. 여전히 큰주둥이고기 목구멍에 걸린 채, 난 책을 펴서 탁한 녹색으로 번쩍이는 차원문을 열었어. 녹색은 우리 고향, 밴들 시티의 색깔이었지. 난 요들의 자그마한 셔츠를 물고 책 속으로 뛰어들었어. 그러자 차원문이 넓어졌고, 우리 눈앞에 다양한 색깔이 어지럽게 뒤섞인 영혼 세계가 펼쳐졌어. 우리는 기침을 하며 어떤 얕은 개울가에서 솟아났지. 밴들 시티의 달콤한 공기가 내 폐를 가득 채웠어. 공기는 꿈에서처럼 짙고 싱싱했지. 땅거미가 진 개울가에선 청옥색 귀뚜라미가 울었고, 물속에는 보통 크기의 물고기가 가득했어. 책이 물에 젖은 책장을 털어내는 동안, 흠뻑 젖은 파란 요들이 몸을 떨며 일어섰어. "대체 어떻게... 탈출한 거지?" 요들이 물었어. "빌지워터에서 가장 가까운 차원문은 항구 쪽이 아니었나?" "운 좋게도, 책만 있으면 어디서든 차원문을 탈 수 있거든." 내가 대답하자, 책은 마치 뽐내듯이 '마른 나무' 책장을 넘겨 보였어. 각 책장에는 잉크와 물감으로 그린 마법 관문이 있었지. "그래, 구해줘서 고마워. 너희 둘 다 말이야." 요들이 말했어. 그리곤 책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덧붙였지. "너도 밴들 시티 출신이야?" "응, 그런데 지금은 여기 안 살아." 나는 대답하곤 슬픈 표정으로 책을 바라봤어. 내 주인, 노라가 떠올랐거든. 그때 책이 펄럭였어. 이제 갈 시간이라는 듯이 말이야. "여기서부턴 돌아갈 수 있지?" 난 요들에게 물었어. "그래, 그릇두더지들을 지나 언덕만 올라가면 돼. 이곳은 내가 잘 알거든. 너도 네 주인을 찾길 바라." 요들은 대답하더니 길을 떠났어. 나는 잠시 가만히 서서 동이 트는 걸 지켜봤어. 지평선 위로 달빛나방이 날아다녔지. 난 당장이라도 나방을 향해 달려들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지금 이 순간 노라가 어딘가에서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난 앞발로 책을 최대한 부드럽게 쓰다듬었어. 책도 노라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그리고 난 책을 펼쳐서 차원문 안으로 뛰어들었어. |
[1]
원문에서는 a door-carrying shepherd with thick whiskers and a deep laugh like a babbling brook, 즉 문짝을 들고 다니는 양치기라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