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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9 23:14:02

웨이드 맥클러스키

클래런스 웨이드 맥클러스키 주니어
Clarence Wade McClusky, Jr.
파일:1000128246.jpg
출생 1902년 6월 2일
미국 뉴욕주 버팔로
사망 1976년 6월 27일 (향년 74세)
미국 메릴랜드주 베데스다
복무 미합중국 해군
최종 계급 미국 해군 소장
복무 기간 1922~1956
학력 사우스파크 고등학교
미국해군사관학교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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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1902년 뉴욕 주 버팔로에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계 부부에게서 태어난 맥클러스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정문제로 대학에 가지 못했고 유조열차 청소부로 일했다. 1926년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1] 조종과정을 밟고 수료했다. 중위로 진급하고 1929년부터 10년간 해군사관학교 전술학교관으로 일했다. 이후 전투기 조종사로 여러 해군 기지에서 복무했다.

1940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의 함상전투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제 2차 세계대전을 맞이했다. 당시 맥클러스키가 소속되어 있는 엔터프라이즈는 대서양에 잠시 파견되어 있었지만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태평양함대로 복귀해 하와이로 거점을 옮겼다. 

1942년 소령으로 진급했고 미드웨이 해전 당시 본래 전투기 조종사 출신인지라 선공필승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돈틀리스 폭격기의 본래 순항 속도보다 빠른 190노트의 속도로 날아 연료가 슬슬 부족해질 때였다. 결국 남서쪽으로 좀더 비행을 해보고 귀환하기로 결정했는데, 때마침 정말 운 좋게도 가느다란 항적을 하나 발견하였다. 이 항적을 따라가면 일본 함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맥클러스키 소령은 추적을 시작했는데 이 항적이 바로 아까 노틸러스를 잡으려다 뒤쳐진 아라시의 항적이었다.

엔터프라이즈 소속 SBD들은 요크타운의 제3뇌격기대대와 제3전투기대대가 아직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던 시점인 10시 22분에 일본 함대의 서남쪽 방향으로 항모 카가의 상공에 도착했다. 제로센들은 요크타운의 뇌격기들과 전투기들을 막으려고 모두 일본함대 동남쪽 상공의 해수면 근처로 내려가 있어서 방해가 될 전투기 세력도 없었다.

상공을 감시하던 카가의 견시병들도 모두 저공에 있던 미군 뇌격기들에 익숙해진 터라 고공에 있던 급강하 폭격기들을 일찍 발견하지 못했다. 카가 견시병들이 급강하 폭격대를 발견하기 이전 10시 19분 히류의 제2 견시원이 히류 기준 좌현 고도에서 발견하고 함교로 보고 했고 야마구치는 즉각 발광 신호로 급폭 경고 신호를 보냈으나 그 시점은 이미 카가 견시원들도 엔터프라이즈 급강하 폭격대를 발견했던 시점이고 이미 미군은 각도를 잡고 급강하를 시작한 시점이었다. 맥클러스키는 이 과정에서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는데, 본인의 선두 그룹을 최후방의 아카기가 아닌 최전방의 카가로 끌고 들어간 것이었다. 이 때문에 휘하 폭격대 대부분이 카가에 들이박는 통에 아카기가 폭격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절차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파악한 리처드 딕 베스트가 휘하 2대를 따로 빼내어 아카기에 폭격을 가하면서 아카기도 마찬가지로 작살났다.

종전 후 대령으로 승진해 6.25 전쟁에서 제7함대의 참모장로도 일한 맥클러스키는 이후 일리노이주의 해군항공기지에서 근무하다가 1954년에 준장으로 승진 후 1956년 7월 퇴역했다. 맥클러스키는 퇴역 시 미드웨이 해전의 공적으로 1계급 특진해 최종계급은 소장이다.

1976년에 사망했다. 사후인 1981년에 취역한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미사일 프리깃 32번함은 미드웨이 해전의 공을 기려 맥클러스키의 이름을 붙였다. 

3. 여담



[1] 하워드 길모어, 로프턴 R. 헨더슨이 동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