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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15:34:54

우로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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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미상
사망 1144년 또는 1145년 (향년 불명)
재위 세르비아 대공
1112년 ~ 1144년 또는 1145년
아버지 마르코
배우자 안나 디오예니사
자녀 옐레니, 우로시 2세, 벨로시, 데사, 마리아
가문 부카노비치 왕조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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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대공국 제2대 대공.

2. 생애

조부는 두클랴 초대 국왕 미하일로 1세와 그리스 출신 2번째 아내 사이의 아들인 페트리슬라프이고, 아버지는 초대 세르비아 대공 부칸 1세의 형제로 전해지는 마르코이다. 즉, 그는 부칸 1세의 조카다. 일부 학자들은 이름만 전해지는 인물, 마르코가 이웃나라인 헝가리 왕국과의 국경에 있는 세르비아 북부 지역을 통치했으며, 헝가리식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하지만 우로시(Uroš)라는 이름이 달마티아 내륙의 더 넓은 지역에 거주하던 로마인에게 흔히 쓰이던 이름이라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기에,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1094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졌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인질생활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112년경 부칸 1세가 사망한 뒤, 그가 새 대공이 되었다. 부칸 1세가 죽고 그가 즉위한 시기의 상황은 명확하지 않으나, 부카노비치 가문 사이에 권력 투쟁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부카노비치 가문의 일원인 자비다[1]는 1113년 제타로 피신했고, 거기서 많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막내아들이 훗날 세르비아 대공이 될 스테판 네마냐였다.

1113년, 콘스탄틴 보딘의 미망인 자퀸타 바리스카는 차남 도르제 보디노비치를 왕위에 올리기로 마음먹고 두클랴 6대 국왕 블라디미르를 독살했다. 자퀸타는 지난날 장남 미하일로 2세를 폐위한 전력이 있었으며, 도르제 보디노비치가 왕위에 오르는 데 방해가 될 잠재적 경쟁자인 도브로슬라프 마저 체포해 감옥에 집어넣고 거세하고 실명형에 처한 뒤 슈코더르의 성 페타르 수도원으로 보냈다. 이렇듯 어머니의 지원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도르제는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 친척들을 모조리 제거하려 했다. 이에 친척들은 아드리아해 연안의 해안도시이자 동로마 제국의 요충지인 디라히온으로 피신했다. 1118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는 칼로얀 쿠만에게 군대를 맡겨 고지슬라프와 함께 두클랴를 침공하게 했다. 도르제는 이들과 맞서싸웠으나 패배하여 대다수 병력을 잃은 뒤, 일부 측근만 데리고 우로시 1세가 군림하던 라쉬카로 피신해 그의 보호를 받았다.

1126년, 도르제는 우로시 1세의 지원을 받으며 두클랴로 진군해 바르 전투에서 그루베샤를 전사시키고 두클랴 국왕에 복위했다. 이후 그루베샤의 두 형제 드라기나, 드라길로와 화해했고, 제타 일부 지역을 영지로 수여했다. 그러나 그루베샤의 또다른 형제인 그라디냐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고 라쉬카로 피신했다. 그 후 우로시 1세가 실각하여 지하 감옥에 갇히자, 도르제는 드라길로의 조언에 따라 자신을 복위하는 데 크게 기여한 우로시 1세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라쉬카로 진군해 우로시 1세를 성공적으로 구출하고 복위했다. 그라디냐는 자후믈례로 탈출한 뒤 디라히온으로 이동했다. 누가 우로시 1세를 권좌에서 밀어내고 지하 감옥에 가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126년,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2세가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가서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파괴한 뒤 소피아를 거쳐 플로브디프까지 진격했다. 우로시 1세는 이에 호응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 세르비아-동로마 제국 국경의 요새를 정복하고 파괴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헝가리군을 물리친 뒤 세르비아군을 공격해 격파한 뒤, 생포한 세르비아 포로들을 아나톨리아 니코메디아 인근에 정착했다. 우로시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침략을 두려워해 평화 협약을 맺고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 이후 제국이 헝가리 왕국과 전쟁을 벌일 때 이를 돕기 위해 보조병 2,000명을 파견했다.

1130년 동로마 제국과 헝가리가 평화 협약을 맺은 후, 우로시 1세는 장녀 옐레니를 헝가리 왕자 벨러와 결혼시켰다. 1131년 3월 1일 이슈트반 2세가 사망한 후, 헝가리 국왕은 2달이 지나도록 정해지지 않다가 1131년 4월 28일 에스테르곰 대주교 펠리키안의 주도로 벨러 왕자가 벨러 2세로서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헝가리 정계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졌다. 과거에 그를 추종했던 이들은 지위를 얻었지만, 칼만과 이슈트반 2세를 지지했던 영주들은 권력에서 쫓겨났다. 특히 그를 실명시키는 데 관여한 자들이 대거 처형되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엘레니 왕비가 모든 재판과 집행을 주관했고 68명에 달하는 귀족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1131년 동로마 제국이 두클랴를 침공했을 때, 우로시 1세는 제국의 가신으로서 이에 가세했다. 도르제 보디노비치가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된 뒤, 동로마 제국은 그라디냐를 두클랴 국왕으로 세우고 제국에 철저히 복종하도록 했다. 이후 두클랴는 쇠락했고, 우로시 1세는 1143년 또는 1144년에 차남 데사를 두클랴의 영토였던 트라부니야와 제타의 통치자로 세웠다. 우로시 1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학자들은 1146년 우로시 2세가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동방 원정을 돕기 위해 보조병 300명을 보냈다는 기록을 볼 때 1144년 또는 1145년에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3. 가족



[1] 부칸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고 부칸의 조카 우로시 1세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