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타 신타로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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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24번 | ||||
히야마 신지로 (1992~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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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타 신타로 (2014~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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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로하스 주니어 (2021~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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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타 신타로 横田慎太郎 | Shintaro Yoko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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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95년 6월 9일 |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 |
사망 | 2023년 7월 18일 (향년 28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히오키시립 히가시이치키 중학교 - 가고시마 실업고등학교 |
신체 | 187cm, 94kg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2013년 드래프트 2순위( 한신) |
소속팀 | 한신 타이거스 (2014~2019) |
SNS | [1] |
등장곡 | ゆず - 栄光の架橋 |
응원가 | 한신 시절[가사(일본어)][가사(한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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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2. 선수 경력
2.1. 프로 입단 전
도쿄도에서 출생. 3세 때 가고시마로 건너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소프트볼을 시작하면서 운동에 입문. 중학교 진학 후에 연식 야구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야구인이 되었다.가고시마 실업고교 진학 후 1학년 가을부터 팀의 4번 타자로 정착. 3학년때는 투수까지 겸하며 중심 타자 겸 에이스로 팀을 이끌기도 했다. 고교 통산 29홈런에 최고 140km/h 후반까지 찍히는 포심으로 투타 양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프로팀의 주목을 받았다.
3학년 여름이 끝난 가을. 2013년 드래프트 회의에 참가해 한신 타이거스의 2순위 지명을 받았고 계약금 6000만엔, 연봉 720만엔(추정치)의 조건으로 입단에 합의했다. 등번호는 이 해에 은퇴한 '대타의 신' 히야마 신지로의 24번을 배정받았다. 입단 당시 한신 구단이 요코타에게 얼마나 높은 기대를 걸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2.2. 한신 타이거스
2.2.1. 2014~2015년
입단 후 2년간은 으레 고졸 선수들이 그렇듯 1군에 올라오지 않고 2군에서 담금질을 거쳤다. 2014년 2군 성적은 타율 .225 6홈런 23타점.2년차인 2015년에는 시범경기에도 출전했지만 이 시즌에도 1군 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해에는 전년도보다 더 많은 경기와 타석에 들어서 타율 .219 9홈런 36타점을 기록했다. 15시즌 종료 후 아시아 윈터 베이스볼 리그에 파견되었고 19경기에서 타율 .302 2홈런으로 준수한 성적을 냈다.
2.2.2. 2016년
당시 신임 감독이던 카네모토 토모아키의 방침에 따라 춘계캠프부터 줄곧 일정을 소화했던 요코타를 타카야마 슌과 함께 시범경기 기간동안 중용하기로 결정. 여기서 요코타는 22안타에 타율 .393을 기록하면서 카네모토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는데 성공해 개막전부터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3월 25일 주니치전에서 프로 첫 도루를 먼저 기록했고 다음날인 26일에는 프로 첫 안타를 기록했다. 4월 6일 요미우리전에선 2012년 히라노 케이이치 이후 4년만에 홈스틸을 기록하면서 좋은 흐름을 이어갔다. 하지만 점차 시즌이 갈수록 출루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타격 밸런스가 흐트러졌고 5월부터 1, 2군을 오가더니 6월 이후로는 1군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시즌 최종 성적은 38경기 타율 .190 4타점 4도루. 2군에서는 타율 .261 5홈런 35타점 15도루를 기록했다. 16시즌 종료 후에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윈터리그에 파견되었고 타율 .379 10도루를 기록하면서 2년 연속으로 윈터리그에서 호성적을 올렸다.
이 시즌이 요코타의 처음이자 마지막 1군 공식전 출전 기록이 있는 시즌이다.
2.2.3. 2017~2018년
2017년에도 여느때처럼 춘계캠프에서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캠프 기간 내내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 결국 캠프 일정을 소화할 수 없는 몸 상태가 되면서 2월 11일자로 캠프에서 중도 하차하게 된다.이후 한동안 활동을 중단하며 안정을 취하다 9월 2일자로 훈련을 재개했다. 훈련 재개 다음날 뇌종양 진단을 받고 반 년 이상 입원치료를 통해 증상이 완화된 상태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신 구단은 2018년 춘계캠프 복귀를 목표로 재활을 마치는 것을 시야에 두고 요코타를 육성 선수로 전환시켜 육성계약을 체결하고 등번호 또한 124번으로 변경한다. 기존의 등번호 24번은 요코타가 다시 정식선수로 전환될 때까지 공번으로 취급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그렇게 재활에 매진하며 맞이한 2018년, 요코타 본인이 직접 계획한 독자적인 연습 스케줄을 중점적으로 소화하되 팀 전체 훈련의 일부분과 타격 연습까지 참가하면서 실전 복귀를 위해 맹연습에 매진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8년에도 요코타의 실전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경기 전 수비 연습과 캐치볼에도 참가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1년 더 육성계약을 체결했다.
2.2.4. 은퇴
하지만 2019년에도 그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뇌종양의 여파로 인해 타구의 궤도와 방향이 보이지 않고 야구공도 2개로 보이는 등 시력 문제가 발목을 잡아 도저히 실전 경기를 뛸 수가 없는 몸 상태였던 것.한신 구단측은 1년 더 그에게 기회를 줄 방침이었고 입단 당시 요코타의 담당 스카우터였던 타나카 슈타[4]를 통해 의사를 전달했으나 요코타는 타나카 스카우터에게 간접적으로 은퇴 의사를 내비친다. 결국 9월 22일에 은퇴를 선언하고 2군 최종전인 9월 26일 소프트뱅크 2군전에서 은퇴 경기와 은퇴 세레머니를 가지게 되었다.
원래는 9회에 대수비로 나갈 예정이었으나 히라타 카츠오 당시 2군 감독은 예정을 조금 앞당겨 8회 2사 2루에서 그를 중견수로 내보낸다. 대수비 투입 이후 상대 타자 이치카와 토모야가 요코타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쳤지만 다음 타자인 츠카다 마사요시의 중전 안타를 받아낸 뒤 정확한 홈 송구로 2루 주자를 잡아냈다.
타구 판단도 어렵고 사물이 2개로 겹쳐 보이는 시력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청각에 의존한 채 놀라운 송구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요코타는 이날 전까지 무려 1096일간 2군 공식전 출전이 없었다. 실전 감각이 무뎌질대로 무뎌진 선수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송구가 나왔으니 그가 얼마나 독하게 재활에 매진했는지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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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타의 현역 마지막 수비 |
미즈타니 슌을 상대로 홈보살을 성공한 멋진 플레이였다.
이렇게 너무나도 짧았던 요코타의 프로 생활은 입단 이후 6년만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3. 은퇴 이후
전도유망했던 선수이기도 했고 재활 훈련 또한 본인이 짠 스케줄대로 매우 성실하게 임했던 그를 높게 평가한 한신 측은 은퇴 이후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유소년 코치직을 제안했지만 요코타는 시력 문제로 인해 코치직 수행이 어렵다는 이유로 정중하게 거절한 뒤 가고시마로 돌아갔다.그 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생활하는 것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의행을 내비치며 유튜브 및 강연 활동, 칼럼 집필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2020년 7월 척수에 종양이 발생하면서 고생하기도 했지만 6개월 간의 입원 치료 끝에 2021년 4월에 퇴원했다. 한달 뒤인 5월 12일에는 한신에 입단하기까지의 과정과 뇌종양 발병 이후의 고뇌 등을 써 놓은 저서 기적의 백홈을 출간하였다. 이후 2022년에 아사히 방송 테레비에서 동명의 제목으로 마미야 쇼타로 주연의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2023년 3월, 종양이 다시 재발하였고 이때 오른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어 실명하고 만다.
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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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타의 빈소 |
요양생활에 들어가며 상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렸으나 요양생활에 들어간 지 4개월 가량이 지난 7월 18일 오전 5시 42분, 요코타는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28세.[5] 요코타를 지도했던 와다 유타카와 카네모토 토모아키 전 감독 등 많은 야구인들이 추도의 메시지를 남겼으며, 1년 선배인 후지나미 신타로는 마운드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세리머니를 하며 요코타를 추도했다.
7월 22일 가고시마에서 고별식이 거행되었다. 고별식에선 모모키타 한신 타이거스 사장을 비롯해 고교 시절 은사였던 쿠보 명예 감독과 미야시타 감독, 유튜브 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카와토 코조[6] 등의 주요 인사들과 100여명 가량의 한신 팬들이 모여 마지막을 함께했다. 고별식 동안 팬들은 롯코오로시와 요코타의 등장곡이었던 영광의 가교, 현역 시절 응원가를 부르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를 추도했다.
한신 구단 측은 7월 25일 요미우리와의 고시엔 홈 경기를 추도 경기로 정하고 구단기와 연맹기를 조기로 게양, 선수단은 검은 리본을 부착하고 경기에 임했다. 경기는 주포 오오야마 유스케의 투런 홈런을 앞세운 한신이 4:2로 승리하며 뜻깊은 날을 보냈다.
리그 우승까지 매직넘버가 1이 남은 9월 14일 요미우리전에선 입단 동기이자 팀의 마무리인 이와자키 스구루가 4:2로 앞선 9회초에 등장곡으로 영광의 가교를 사용하며 등판, 사카모토 하야토에게 홈런 1개를 맞긴 했으나 4:3으로 승리를 지켜내는데 성공했고 18년 만에 한신이 리그 우승을 하는데 성공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잡힌 직후 마찬가지로 입단 동기인 우메노 류타로는 요코타의 유니폼을 들고 뛰쳐나와 리그 우승의 기쁨을 요코타의 유니폼과 함께 만끽했다.[7]
일본시리즈에서도 한신 선수단은 요코타의 유니폼과 함께했고 38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이 확정되는 그 순간에도 요코타의 유니폼은 한신 선수단과 함께였다. #
비록 살아생전에는 꿈을 펼치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되었으나 선수단은 먼저 떠난 그에게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선사해주었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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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프트 당시 평가는 186cm 85kg의 체격에
서전트 점프가 80cm였고 투수로도 최고 147km의 구속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받았었다. 얼마나 고평가를 받았었냐면
카네모토 토모아키나
이토이 요시오,
야나기타 유키 등의 5툴 플레이어들에 비견됐을 정도였다.
- 2016년에 감독으로 부임한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요코타에 상당한 기대를 가져 1차 뇌종양 투병 당시 치료비의 상당수를 자비로 지원했다고 한다.
- 아버지인 요코타 마사유키 역시 우투좌타 외야수 출신으로, 10년간 롯데, 주니치, 세이부를 거쳐 선수생활을 했었다.
[1]
스포니치 한신 타이거즈 담당기자 엔도 레이가 가끔씩 신타로의 사진을 올리곤 한다.
[가사(일본어)]
熱き闘志と 勇気をバットに 今こそ羽ばたけ それ行け横田 「かっとばせー よーこーたー」 (아츠키 토오시토 유우키오 밧토니 이마코소 하바타케 소레이케 요코타 「캇토바세 요코타」)
[가사(한국어)]
뜨거운 투지와 용기를 배트로 지금이야말로 날개를 펼쳐라 나아가라 요코타 「날려버려 요코타」
[4]
現 한신 타이거스의 2군 내야 수비 주루 코치. 1994년 드래프트 3위로 한신에 입단해 주로 수비 백업요원으로 2009년까지 뛰고 은퇴했다. 스카우터 재직 시절엔 요코타 이외에
우메노 류타로,
하마치 마스미,
오바타 류헤이 등을 발탁해냈다.
[5]
이미 5월 무렵부터 주치의에게 길어봐야 2주일이라는 소견을 받은 시한부 상태였다고 한다.
[6]
1968~1986년까지 한신 타이거스에서 뛰었으며 고교 시절엔 투수였으나 프로에선 야수로 뛰었다. 1973년에 1군에 정착해 활약하던 찰나에 1975년에 아킬레스건 파열을 당했고, 이후로는 주로 대타로 뛰었다. 1990~1991년까지는 한신 1군 코치를 맡기도 했으며, 2010년에는
타부치 코이치 후임으로 한신 OB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7]
이후 재팬시리즈에 동기들이 자진해서 유니폼을 가져와 라커룸에 건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생전에 인망이 좋아서였던지 드래프트 동기들과 굉장히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유니폼은 새로 마킹한 것이 아니고, 요코타의 유족들이 실착 유니폼을 구단에게 전달해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