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16:26:05

왕후장상 영유종호

고사성어
임금 왕 제후 후 장수 장 재상 상
어찌 영 있을 유 씨앗 종 어조사 호
1. 개요2. 상세
2.1. 시초2.2. 분석2.3. 현황
3. 기타

1. 개요

公等遇雨,皆已失期,失期當斬。藉弟令毋斬,而戍死者固十六七。(공등우비 개이실기 실기당참 자제령무참 이수사자고십육칠)
너희들은 비를 만나 모두 기한을 어겼고 기한을 어겼으면 참수를 당할 것이다. 참수를 당하지 않더라도 (수자리) 지키는 사람 열 명 중 예닐곱 명은 죽을 것이다.

且壯士不死即已,死即舉大名耳,王侯將相寧有種乎!(차장사부사즉기 사기거대명이 왕후장상영유종호)
또 장사(壯士)란 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죽는다면 명성을 드러내야 할 뿐이다. 왕(王), 후(侯), 장(將), 상(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
사기(史記)·진섭세가(陳涉世家)』
왕, 제후, 장수, 재상의 지위는 혈통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의 성어.

고대 중국 통일 진(秦)나라 이세황제 진승 봉기를 일으키며 외친 말이다.

2. 상세

2.1. 시초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는 천하 통일이 채 안정화되기도 전에 급진적인 개혁과 법가를 기반으로 한 폭압적인 통치로 국가에 무리를 끼쳤고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사망할 무렵 민심은 불과 11년 동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이세황제 호해(胡亥)[1]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조종당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제국엔 망조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209년, 양성(陽城),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동남쪽 출신인 진승은 900여 명의 인부들과 함께 만리장성의 건설에 동원되어 공사처로 향하던 중 큰 비가 내려 900명이 함께 고립된다. 제때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 명백해지자 인부들은 진의 혹법에 따라 받을 형벌이 두려워졌다. 목이 날아가게 된 처지에 놓이자 평소 야심이 있던 진승은 반란을 결심하고 봉기할 때 그는 휘하 인부들을 설득하면서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발언으로 좌중을 선도하였다.

이후 이 문장은 일반 민중에게, 특히 난을 일으키는 민중에겐 일종의 구호로 기능하게 된다.

2.2. 분석

여기서 쉽게 간과되는 점은, 이 문구가 반봉건의식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황에 따라 그런 응용이 가능하냐 여부는 차치하고 '왕후장상 영유종호'가 맨 처음 표방한 가치는 넓은 의미로 해석한들 민중 해방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진승은 본디 소작농이었고[2] 출신 성분이 비천한 만큼 배움이 없었으나 가슴에 품은 뜻이 크고 출세에 목말라 있음을 그는 숨기지 않았다. 세상을 한탄하면서 야망을 감추는 법을 몰랐기에 주위에서 그런 그를 비웃자 연작(燕雀)[3]은 홍곡(鴻鵠)[4]의 뜻을 모른다는 비유를 내세웠다. 시기가 되어 거병하였으나 그것은 우발적이면서도 계획된 것이었고, 그렇게 궐기할 때 수졸들의 동조를 얻으려 '진승왕'이라는 계시를 날조했다. 난의 구호로서 '왕후장상 영유종호'는 그저 누구나 왕위를 도모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지, 신분 질서와 계급 체계, 왕조 체제를 타파하자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뜻이 와닿는 방식은 사뭇 달라지게 된다.[5] 즉 " 신분질서 타파하자!"가 아니라, " 나도 왕후장상 하고 싶다!"인 것이다.

문제는 왕후장상이 되고 싶은 사람이 꼭 진승과 오광만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보니 결국 진승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정작 아무도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진승이 왕위에 오르기 전 현자로 유명한 장이와 진여가 진승에게 먼저 진나라를 치고 나서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지만 이미 간이 부풀대로 부푼 진승은 이를 거부하고 신상필벌을 한다는 핑계로 스스로 초왕에 올라 장초를 개국했다. 하지만 다들 왕후장상 영유종호를 외치다보니 결국 아무도 진승을 따르지 않게 되었던 것. 과거 육국의 후예도 아니었던 진승이 왕으로써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진나라를 무너뜨렸다는 타이틀은 있어야 하는데 욕심이 앞서 왕위에 오르고 나니 이미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은 부하들은 이제 더이상 진승의 휘하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결론적으로 왕후장상 영유종호가 전부가 아니라 이를 유지할 만한 명분이나 실력을 지니지 않으면 아무리 외쳐봤자 공허한 말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아무것도 없던 진승이 이렇게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말을 첫번째로 시도함으로도 이후 "쟤도 왕 하고자 하는데 내가 못 할 쏘냐"라며 왕족, 귀족이 아니더라도 너도나도 왕 자리에 도전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기는 했다.[6] 오죽하면 당고조는 "솔까 주나라 이후의 천자들은 나 빼곤 구려터진 가문 출신 아님?"이라고 했을 정도다...[7][8]

2.3. 현황

한편, 청 말기 청 황실이 흔들릴 때 공화주의 자유주의, 계급투쟁에서 원래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종종 인용되기도 했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마침내 명목상으로는 왕후장상에 차이 없는 나라가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말이 제국인 청나라에서 공화국인 중화민국으로 옮겨갔을 뿐이지 자칭 만민평등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에서 실력 있는 군벌들이 중국 내 소왕국의 왕들로 군림하고 있었고[9] 국공내전으로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이주하고 공산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이 되고 나서도 태자당, 시자쥔(습가군) 등 말만 공화국이지 사실상 귀족공화국 같은 행태를 띄고 있어서 유명무실해졌다.[10]

그리고 대한민국은 현재로서는 일단 왕후장상 없는 민주공화국이 되긴 했으나 프랑스 혁명처럼 국민 손으로 군주를 끌어내고 공화국을 세운 게 아니라 나라를 일제에게 먹힌 상태였다가 독립하여 공화국이 된 것이니 본래 의미(나도 왕 해보자)면 몰라도 현대에 들어서 와전된 그 의미(계급투쟁으로 인한 민주공화제)로서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3. 기타

왕후장상 영유종호는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 드라마에서도 가끔 언급된다.

[1] "진을 망하게 하는 것은 다"에서의 그 호가 이 인물이다. 즉, 시황제 본인의 실책과 별개로 후계자 선정조차 잘못하여 망국의 길로 이끈 것. [2] 다른 기록에 의하면 진승은 날품팔이, 즉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라고 묘사되어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슷하다. [3] 제비와 참새 [4] 기러기와 고니. [5] 난을 일으키는 데 동원한 대의명분이 제 한 목숨 살리고 자신이 기왕 왕위에 오르겠다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단 점에서 당시의 정황과 진승이라는 반란 지도자를 이해하는 각도 자체에 변화가 불가피하다. [6] 이전까지는 정말로 전국시대에 새로 떠오른 이들, 전씨(제나라), 위씨(위나라), 조씨(조나라), 한씨(한나라)만 봐도 위씨와 한씨는 주나라와 같은 희성이고 조씨는 진시황의 진나라와 같은 영성 조씨며 전씨마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순임금까지 올라간다. 그나마 제일 구린게 조씨지만 그 구린 조씨도 적어도 시조는 상나라 시기까지 올라가며 주목왕 시절 공을 세워 주나라로부터 영성을 주효왕 시절에 조씨를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승에 비할 수준은 아니다. 나머지들도 예시로 제나라의 강씨는 강태공이 뭐하고 지냈던 이인지 제대로 된 기록이 없지만 어차피 춘추시대만 되어도 수백년 역사를 지닌 가문이 되었다. 그나마도 이쪽은 제후국이고... [7] 당나라의 이씨는 자신이 노자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다만 노자도 구태여 보면 그 출생부터가 딱히 대단할 게 없는 출신이다. 그래도 제자백가에 포함되는 인물에 도교에서는 신으로 추앙하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8] 물론 이연은 자기네 집안이 오랫동안 내려오던 혈통이라는 점을 자랑하려고 저런 말을 한 것이고 노자와는 사실 별로 상관이 없다. 그보다 이연의 집안은 진나라 이신(만화 킹덤의 주인공의 모델인 그 이신 맞다)에서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집안이고 또, 관롱집단이라는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인 귀족 가문이기도 했기에 저런 헛소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혈통보다는 업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에 와서는 그냥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말이지만... 그리고 이연의(그리고 황제 집안의) 가문조차도 당대 관롱집단에게 있어서는 그리 대단한 가문으로 보이지 않았는지 유서깊은 가문에 껴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잘나신 집안들은 전부 주전충 손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9] 특히 몇몇은 중국 본토를 침략해온 일본과 협력하기도 했다. [10] 물론 독재자인 시진핑 또한 장기집권만 꿈꾸지 외동딸인 시밍쩌에게 세습시킬 생각은 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