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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광(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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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廣
(? ~ 251년)
1. 개요2. 생애3. 기타 창작물

1. 개요

삼국시대 조위의 관료이며 자는 공연(公淵)으로 왕릉의 장남, 왕비효, 왕금호, 왕명산의 형. 병주 태원군 기현 사람. 제갈탄의 사위이기도 하다.

2. 생애

249년 왕릉이 영호우 등과 함께 초왕 조표를 옹립하고자 해서 낙양에 사신을 파견하자 천자의 폐립은 중대한 일이니 재난의 징조로 삼지 말라고 해서 말렸으며,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상 일파는 민심이 없었지만 사마의 일파는 민심이 있다면서 이를 말렸다.

그러나 왕릉은 이를 따르지 않고 251년 수춘에서 궐기하려다가 황화와 양홍의 밀고로 발각되었는데( 왕릉의 난), 이 때 왕광은 상서를 지내면서 사마의의 지시로 동쪽으로 가 왕릉을 편지로 항복시켰다. 왕광은 뜻이 있고 학문·덕행이 숭상되었지만 40여 세에 사망했으며, 위지에 따르면 왕릉이 주살당했을 때 함께 죽었다고 한다.

장제가 사마의와 대화를 통해 왕광에 대해서 문무를 견줄만한 자가 없고 아버지 왕릉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했다. 확실히 부친 왕릉에 비해 시세를 보는 식견이 있었으나 아비 잘못 만나서 연좌로 처형된 것이 안타까운 비운의 인물.

여담으로 세설신어에 나오는 일화에 따르면 부인을 보고 '장인어른은 잘 생겼는데 부인은 왜 그런가' 깐(…) 적이 있다고 한다. 장모님 놔두고 장인어른 얘기한 걸 보면 제갈탄이 미남이 맞는 모양이다 그러자 부인에게 '대장부인 당신도 시아버님을 안 닮았더만 아녀자인 내가 어찌 (아버지를) 닮겠냐'는 말로 되려 털렸다(…)고.

3. 기타 창작물

진삼국무쌍 6에서는 왕릉의 난 때 등장해 동생인 왕비효, 왕명산, 왕금호 등을 설득하려고 해서 왕비효, 왕명산, 왕금호 등의 군단을 혼란시키는 역할로 나온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평범하게 눈썹이 두꺼운 갈색 머리의 청년으로 등장. 기반 패러디는 불명.

신성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왕릉이 영호우의 꼬임에 넘어가 조표를 옹립하려고 하자 삼족 멸할 일 있냐면서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니라 했고 조상 일파가 하도 난리를 쳐서 사마의가 권력을 잡아 다들 경사라고 생각하고 민심도 사마의에게 있다고 말렸다. 이후 아버지야 얼마 안 남았지만 자기는 창창하니 행여라도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나, 결국 왕릉은 영호우와 일을 진행시켰다.

진삼국무쌍 8에서는 제12장인 조위 정변의 왕릉의 난에서 왕광의 수색이라는 임무로 찾아서 격파해야 할 대상이며,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무장과 만나면 들켰다면서 죽이러 온 것으로 오해하고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공격한다.

왕광이 격파되면 죽이러 온 것이 아닌 것을 깨닫고 아버지인 왕릉을 설득하기로 하며, 수춘성 이동 후에는 왕릉에게 반란을 그만두라면서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이 진심이냐고 물어보지만 왕릉은 폐를 끼쳤다면서 사과하고 이미 늦었음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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