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오스틴 1800. ADO17 프로젝트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
BMC ADO17[1]
(Austin-Morris 1800-2200 / Wolseley 18/85 - Six)
1. 개요
영국의 자동차 업체인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BMC)[2]이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생산한 중형차 라인업이다.당시 BMC의 수석디자이너이자, 베스트셀러 차량인 미니와 모리스 마이너, BMC ADO16[3]의 아버지였던 알렉 이시고니스가 설계한 차종이었으며, 대히트작이었던 미니와는 달리, 오스틴 맥시와 함께 시장을 잘못 읽음으로서 오히려 실패작으로 남고 말았다.
2. 배경
1968년식 오스틴 1800 Mk1 |
그리고 시간이 지난 1958년 가을, 초대 미니의 개발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이시고니스는 미니에서 쓰던 앞엔진 앞바퀴굴림 설계를 중형차에 적용하기로 결정하고 "XC9001"이라는 이름 하에 새 중형차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XC9000 프로토타입에 앞바퀴굴림 설계만 적용한 수준이라 BMC의 경영진들이 차량 디자인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고, 디자인을 다시 하는 과정에서 BMC와 연줄이 있었던 피닌파리나도 디자인 작업에 같이 참여했다. 그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새 디자인 작업이 완성되었는데, 피닌파리나에서는 차후 출시될 BMC ADO16과 비슷한 깔끔한 세단 스타일의 차를 공개했으며, BMC 내부 디자인팀에서는 훨씬 크고 화려한 디자인을 제안했다.
(옆면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축간거리가 길어 전반적인 비례가 어색한 편이다.)
이때 BMC에서는 "훨씬 크다"는 점을 이유로 내부 디자인 팀의 디자인을 최종 선택했는데, 당시 BMC에서는 MG B 스포츠카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1622cc B-시리즈 엔진을 확장한 1798cc 버전을 개발해야 했던 참이였고, 따라서 이 엔진을 다른 차에도 돌려 쓸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BMC에서는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피닌파리나식 중형차 라인업의 후속차종으로 이 프로젝트의 방향을 선회하기로 했다. 이에 힘입은 이시고니스와 디자인 팀은 기존의 피닌파리나식 중형차의 제원을 따르는 대신 1.8리터 B-시리즈 엔진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축간거리와 차폭도 크게 늘렸다. 당시 변경된 전폭과 축간거리를 따라 실내 공간도 당시 BMC에서 팔던 대형 세단인 오스틴 A95 웨스트민스터보다 더한 수준으로 상당히 넓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축간거리가 기존 중형차의 2521mm에서 2700mm으로 크게 늘어났음에도 차량의 전반적인 전장은 기존 중형차의 4534mm보다 훨씬 짧은 4200mm이라 당시 영국 고객들의 입장에서는 납득히기 어려운 비례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이로 인해 ADO17은 본래의 목표였던 차기 중형차 후속모델이라는 방침과도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개발 과정 도중에 레오나드 로드(Leonard Lord) 경의 후임으로 들어온 조지 해리만(George Harriman)도, 이시고니스의 뛰어난 역량과 1.8리터급 차량의 수요가 많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이를 내버려두었지만, ADO17 프로젝트(XC8001)[4]가 한창 개발중이던 1960년만 하더라도 영국에서는 중형차급에서 주류를 차지했던 1400~1500cc급 차량의 등록 비중이 19.6%를 차지하던 반면에 1700~1800cc급 차량은 고작 5% 정도만 등록되어 장기적으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5]
당시 ADO17의 기술 개발은 3개의 기술팀들 중 크리스 킹엄(Chris Kingham)이 지휘하는 "B-Cell" 개발팀[6]에서 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B-Cell 기술팀이 있던 곳은 이시고니스가 머물고 있었던 영국 롱브릿지에 위치한 덕분에 그의 입김이 훨씬 강했다. 물론 이시고니스가 구상하던 데로 기술팀들이 잘 따라주기는 했으나, 문제는 개발이 계속 진행될수록 기존의 피닌파리니식 중형차들의 "후속"으로 기획했던 본래의 계획과 가면 갈수록 멀어져갔다는 것이다. 나중에 ADO16 준중형차 라인이 출시된 후에 피닌파리나가 영국 디자인팀에서 완성한 디자인을 손보았는데, BMC에서 여전히 이시고니스와 그의 동료들이 디자인한 시안을 그대로 고수하는 바람에, 피닌파리나가 손댈 수 있는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라 앞모습 정도만 겨우 손봐 제안할 수가 있었다.[7]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엔진 라인업은 MG B와 같이 사용하는 1.8리터 B-시리즈 엔진을 적용하되 단일 카뷰레터 버전의 정숙성이 너무 떨어진다는 점을 고려해 크랭크축의 베어링 수를 3개에서 5개로 늘렸고, 실린더의 너비도 76.2mm에서 80.3mm으로 늘렸다. 이러한 개량 과정을 거침으로서, SU 카뷰레터가 장착된 1.8리터 버전은 적절한 수준인 최고출력 85마력을 기록할 수 있었다. 엔진 외의 다른 부분은 이시고니스가 설계한 ADO16 준중형차 라인과 똑같았으나 서브프레임이 없는 완전 유니 바디 차체 구조[8]를 수용했고, 변속기도 엔진으로부터 훨씬 뒤에 있는 앞바퀴 서스펜션[9] 밑에 집어넣어 차량 패키지를 보완했다.
변속기의 윤활 계통(lubrication system)도 개선해, 엔진 안에 위치한 변속기의 '변속하기 힘들다'는 구조적인 약점을 커버하려고 했다. 차체의 유니 바디 구조도 서브프레임 없이 만들어질 계획인만큼, 완전한 유니 바디 구조로 만들되 앞바퀴 서스펜션과 엔진을 차체에 직접 장착하기 위해서는 차체를 매우 견고하게 설계해야 했다. 결국은, 심지어 컴퓨터 설계를 도입한 후속차였던 1974년식 오스틴 프린세스조차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차체 골격이 매우 견고해졌다. 개발 과정
3. 출시 및 판매
(사진은 1965년식 오스틴 1800.)
그렇게 해서 1964년 9월에 "오스틴 1800"이라는 이름으로 ADO17 중형차의 첫 라인업이 출시되었다. 1.8리터 엔진에다가 엄청나게 견고한 차체를 얹다보니 가격도 기존에 오스틴에서 팔던 A60 캠브릿지[10]에 비해 훨씬 비싸고, 무겁고, 큰 차가 되었으며, 캠브릿지를 단종시킬 경우에는 오스틴 1100/1300[11]과 1800 사이에 큰 틈새가 생길 게 뻔히 보였기때문에, 결국 BMC에서는 돈도 안 되는데다가 출시된 지 수년이 지난 캠브릿지와 같이 1800을 병행 판매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가격조차도 캠브릿지보다 14% 더 비싸게 책정되어, 오스틴 브랜드로 파는 대형차인 웨스트민스터와 중형차 캠브릿지 사이에 배치하는 "틈새시장" 라인으로 배치되었는데, 그럼에도 조지 해리먼은 오스틴 1800이 매주 4000대가 생산될 것이며, 차를 판매하는 데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 장및빛 예측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비싼 가격부터 애매한 크기까지 이르는 온갖 문제들 때문에 1800에 대한 수요는 매우 부진했다. 게다가 ADO16 준중형차를 팔 때와 마찬가지로, 모리스 버전이 추가된 1966년까지 오스틴 브랜드로만 판매됨에 따라 BMC의 대리점 체계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심지어 1965년 1월 27일에는 1800의 생산대수를 늘리겠다고 BMC에서 미니와 캠브릿지가 각각 생산되던 카울리(Cowley)와 롱브릿지 공장을 맞바꾸겠다는 발표도 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했다. 당시 중형차 및 준대형차를 구입하던 영국 내수의 법인차 시장이 보수적이었던 점을 넘어가버린 것도 ADO17이 고전한 이유 중 하나였다.
자동차 매체들이 1964년 7~8월 사이에 사전 시승을 했을 때는 튼튼하고, 힘 좋고, 편안하고, 실내 공간도 넓으며 설계도 현대적이라는 호평이 이어졌으며, 알렉 이시고니스의 "천재성"이 오스틴 1800의 성공을 보장하리라는 예측도 있었다.[12] 하지만 ADO16 준중형차와 미니가 그랬듯이 실내공간을 뽑아내는데 집중하느라, 운전대 칼럼의 각도를 비롯하여 인체공학과 다소 거리가 멀어진 실내 구성은 운전 자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비록 미니처럼 핸들링이 좋고 운전하기 좋은 차라고는 하지만 변속하기도 어려운데다가, 앞바퀴굴림 설계를 보완하려는 세팅 때문에 운전대는 꺾기 너무 무거워졌고,[13] 파워스티어링도 내수 경쟁차들이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제공하질 않았다.[14]
모리스 1800 Mk1 | 울즐리 18/85 Mk1 |
매주 4천대는 커녕 1966년까지 고작 7만대 정도만 생산되었고, 연간 최다 생산대수가 1965~1966년 사이에 5만 6천 876대에 불과한데다 기껏해야 매년 4만대가 좀 넘는 수준의 판매부진을 극복하고자, 1966년 3월과 1967년 3월에는 모리스와 울즐리 브랜드로도 "모리스 1800"과 "울즐리 18/85"[16]라는 이름 하에 판매가 시작되었다. 본래는 라일리(Riley) 브랜드로도 ADO17 중형차를 판매하려고 했지만 이미 기존에 판매하던 차들이 처음부터 안 팔리는 바람에 무산되었으며, 웨건 버전은 오스틴 맥시(ADO14) 해치백의 개발이 시작된데가 기존의 오스틴 캠브릿지/모리스 옥스포드의 웨건 버전과 "집안싸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무산되었고, MG 버전은 "스포티함"과 거리가 먼 차량의 이미지 때문에 기획되지 않았다. 반덴 플라(Vanden Plas)에서는 1800을 고급스럽개 개조했으며, 디자인 과정에서 호주시장용 차량을 기반으로 만들어 디자인도 어느 정도 개선되었으나, 1968년에 브리티시 레일랜드(이하 BL)이 결성됨에 따라 로버 및 트라이엄프와 같은 다른 고급차들과의 마찰이 염려되어 생산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위 사진은 오스틴 1800 Mk2와 모리스 1800S |
1968년 5월에는 오스틴-모리스 1800의 Mk2 버전을 출시해 기존의 13인치 휠을 14인치로 키웠고, 스티어링을 좀 더 가볍게 세팅했으며 후미등도 수평에서 수직 형태로 바뀌었다.[17] 인테리어 역시 원가절감과 함께 좀 더 일반적인 구성으로 바뀌었고, 그릴을 비롯한 외관 장식도 일부 바꾸었다. 기술적으로는 엔진 출력을 86마력으로 끌어올린 뒤 변속기의 2단 및 최종 단수의 변속비를 높이고, 서스펜션의 롤러 베이링도 서스펜션 부시(bush)로 교체해 부분적인 비용 절감도 이루어졌다.
모리스 2200 | 1973년식 오스틴 1800 Mk3 |
그래도 후속차가 나올 때까지 판매량을 살릴 필요는 있었기에 1969년 5월에는 울즐리 18/85의 Mk2 버전이 공개되었으며, 그해 7월과 9월에는 모리스 버전에 이어 오스틴과 울즐리 브랜드로도 "S" 사양이 등장했다. 1972년에는 Mk3 버전을 출시하면서 오스틴과 모리스 버전의 그릴 디자인을 하나로 통일하고,[19] 핸드브레이크를 바닥에 설치하는 등의 인테리어 개선도 있었다. 또한 호주 사양에서 쓰던 2227cc E-시리즈 SOHC 직렬 6기통 엔진[20]이 추가되었으며, "울즐리 식스(Six)"라는 이름 하에 판매된 울즐리의 6기통 버전이 6기통 라인업 중에서 가장 실적이 좋았다. 이때 울즐리 18/85는 6기통 버전에게 자리를 내 주고 단종되었다.
(사진은 1973년식 울즐리 식스.)
1975년 초반에 단종 때까지 총 387,283대[21]의 ADO17 중형차 시리즈가 만들어졌으며, 1974년에 오스틴과 모리스, 울즐리 브랜드로 차세대 오스틴 프린세스(프로젝트명 ADO71)가 후속 차종으로 출시되었다가 1975년부터 "프린세스"라는 단일 브랜드로 통합되었다. 2016년 5월 현재 영국에는 오스틴 버전 177대와 모리스 버전 130대, 울즐리 버전 95대[22]가 영국에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는 알렉 이시고니스의 "독단"[23]이 낳은 실패작이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3.1. 오스틴 3리터(3-Litre)
3.2. 해외 시장
4. 여담
어색한 디자인과 튼튼한 차체, 그리고 내구성 경기에 참여했던 랠리카 선수들의 발언 때문에 "참게(Landcrab)"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지금도 자동차 애호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저 있는 별칭이다. 견고한 차체 구조 덕분에 내구성 경기에서 좋은 실적을 거둔 것은 물론, 데몰리션 더비를 비롯한 폐차 경기에서도 자주 애용했다.5.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word-break:keep-all; min-height:2em"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484d9> 차급 | 단종 차량 |
경차 | 미니 세븐/미니 · 미니 컨트리맨 | |
소형차 | 메트로 | |
준중형차 | 알레그로 · 마에스트로 · 아파치 | |
중형차 | 1800/2200 · 맥시 · 몬테고 · 앰베서더 | |
준대형차 | 3리터 · 프리웨이 |
[1]
코드명의 ADO는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의 개발부서 Austin Drawing Office의 약자다. 출처에 따라 Amalgamated Drawing Office로도 알려져 있다.
#
#
#
[2]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전신이다.
[3]
이시고니스가 설계한 앞바퀴굴림 준중형차 라인업.
[4]
당시 BMC 내부에서는 이 차를 주로 ADO17로 칭했으나, 이시고니스는 XC8001로 주로 칭했다.
[5]
1960년 당시 포드에서 생산한 중형차인 컨설 클래식은 1.3L과 1.5L 엔진을 제공했으며, 후속모델인
컨설 코티나도 1.2L, 1.5L, 1.6L 엔진을 제공했다. 컨설과 코티나의 경쟁차들 역시 차종별로 복스홀 빅터의 경우는 1.5L과 1.6L의 2개 엔진 라인업을, 힐만 밍크스의 경우는 1.5L과 1.6L을 포함해 1.4L부터 1.8L 사이의 총 4개 엔진 라인업을 제공했다.
[6]
당시 이시고니스 하에 있었던 기술팀들은 3개의 Cell로 나누어져있었는데, A-Cell은 미니 개발에 올인하고 있었고 C-Cell은 ADO16 준중형차의 개발에 올인하고 있었다.
[7]
본래 피닌파리나의 의도대로였다면, ADO17 중형차의 전반적인 개발 방향이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었다.
[8]
이시고니스는 서브프레임이 차량 무게와 생산 및 개발비용을 늘린다고 믿고 있었다.
[9]
알렉스 몰턴이 개발한 유압식 현가장치 하이드로래스틱(Hydrolastic)이 적용되었고, 서스펜션 구조를 구성하는 튜브 안에 하이드로래스틱 본체가 들어가있다.
[10]
피닌파리나식 중형차 라인업 중 하나였다.
[11]
ADO16 준중형차 라인업 중 하나였다.
[12]
심지어 출시된 지 1년이 지난 1965년에는 "유럽 올해의 차" 상까지 수여했다.
[13]
본 문서를 작성할 때 참조한 AROnline의 ADO17 개발기 포스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Also the steering was unacceptably heavy and low-geared, but as Issigonis was breaking new boundaries in launching such a large front wheel driven car, it was accepted that the steering would have to be given a lower ratio rack in order to keep effort down."
[14]
그나마 미니와 ADO16은 소형차 계열인지라 이 문제점들이 용납될 수 있었지만, ADO17은 중형차와 대형차 사이에 위치한 "크고 비싼 차"라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다른 중형차들을 재껴두더라도, 그나마 ADO17과 비교할만한 차였던
시트로엥 DS도 파워스티어링이 제공되었다.
[15]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밸브 기구가 팽창하여 밸브 면과 밸브 시트가 밀착되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인위적 간극으로, 밸브 스템 엔드와 로커 암 사이의 틈새를 말하며, 조정 나사로 조정할 수 있다.
[16]
1938~1948년 사이에 생산된 동명의 차량에서 이름을 따 왔다.
[17]
다만 울즐리 18/85는 기존의 후미등 디자인을 유지했다.
[18]
같은 해에 미니가 이미 9만대를 찍었고, 캠브릿지/옥스포드는 3만대가 판매되었으며, 1946년에 등장해 이때까지도 판매했던 소형차인 모리스 마이너조차도 2만 2천 500대가 판매되었다.
[19]
다만 1800과 2200 버전의 그릴끼리는 엠블럼 위치로 구분할 수 있다.
[20]
크기를 가능한 한 작게 만들기 위해 물 재킷(Water jacket. 내연 기관 등의 과열을 냉각시키는 장치)도 빼버렸다.
[21]
오스틴 버전이 22만 1천대, 모리스 버전이 9만 5천 271대, 울즐리 버전이 3만 5천 597대 생산되었다.
[22]
다만, 이 숫자는 조사 과정에서 오스틴 프린세스를 기반으로 만든 동명의 후속차까지 포함된 수치이다.
[23]
그가 사망하기 전인 1980년대 중순, 이시고니스는 초대 미니를 예로 들며 "시장조사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며, 차를 설계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고객들이 원하는 차를 알고 있다."고 발언한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