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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1 21:44:13

예호슈아 글라저

파일:Yehoshua Glazer.jpg
이름 예호슈아 "시예" 글라저
(יהושע "שייע" גלזר / Yehoshua "Shiye" Glazer)
생년월일 1927년 12월 29일
사망년월일 2018년 12월 29일 (향년 91세)
국적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출신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텔아비브
포지션 포워드
신체조건 173cm
소속팀 마카비 텔아비브 FC (1945-1963)
하포엘 크파르 사바 FC (1963-1964)
베이타르 네타냐 (1964-1965)
베이타르 예루살렘 FC (1965-1966)
섹치아 네스 치오나 FC (1966-1967)
국가대표 35경기 18골 (1949-1961)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클럽5.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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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라엘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글라저는 마카비 텔아비브 FC 유스 선수였다가 1945년에 1군 무대를 처음 밟았다. 마카비는 글라저가 데뷔하던 당시에도 이스라엘 리그를 대표하던 팀이었고 1946-47 시즌에 이미 더블을 달성했다.

1948년에 글라저는 이스라엘 축구대표단의 미국 투어에 참가하기도 했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 첫 리그 우승도 마카비의 차지였다. 원래 글라저는 수비수로 데뷔했지만 센터 포워드로 포지션을 옮겼고 팀의 주전이자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1951-52 시즌에 글라저는 27골을 넣어 리그 득점왕이 되었는데 이는 한동안 이스라엘의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963년까지 마카비에서 뛴 글라저는 1967년까지 하부 리그 팀들을 돌아다니며 경기를 뛰었는데 축구를 즐기고픈 마음으로 뛰었다고 한다.

2.1.2. 국가대표

글라저는 이스라엘 대표팀 소속으로 1950년부터 1962년까지 4차례의 FIFA 월드컵 지역예선에 참가했지만 이스라엘은 단 한 차례도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이스라엘은 유고슬라비아와 맞붙었는데 1949년 8월 21일의 베오그라드 원정에서 0:6으로 참패했다. 이어서 9월 18일에 있었던 텔아비브 홈경기에서 이스라엘은 유고슬라비아에게 2:5로 또 졌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글라저는 2골을 모두 넣어 이스라엘의 축구팬들에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리고 글라저는 1950년 10월에 튀르키예를 상대로 해트 트릭도 기록하며 이스라엘의 5:1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글라저는 1956년 올림픽 예선전으로 소련 텔아비브에서 시합을 한 적이 있다. 이 시합은 다윗 골리앗의 시합으로 여겨졌고 예상대로 이스라엘은 소련에 1:2로 졌다.[2] 여기서 글라저는 경기 종료 직전에 공 대신 소련의 골키퍼 레프 야신의 손을 걷어차는 실수를 범했다.

글라저의 대표팀 말기인 1960년 5월, 그는 잉글랜드 U-23 팀과의 친선전에서 하프 타임때 감독의 교체 지시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 교체 지시 거부가 정당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글라저는 후반에 득점을 올렸고 이스라엘은 잉글랜드 U-23팀을 4:0으로 이겼다.

글라저는 이스라엘 대표팀 시절 대한민국과 약간의 인연이 있다. 1956년 1960년, 2회 AFC 아시안컵에 참가했지만 이스라엘은 대한민국에 두 대회에서 모두 패해 아시안컵 우승에 실패했다. 특히 1960년 아시안컵은 효창운동장에서 열렸으니 글라저 역시 이스라엘 대표팀 소속으로 방한한 적이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글라저는 현역 시절 이스라엘과 마카비 텔아비브 FC를 대표하는 공격수였다.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전에 열린 모스크바 경기에서 소련은 5:0으로 이스라엘을 대파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