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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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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포산시절3. 홍콩시절

1. 개요

중국의 무술가 엽문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포산시절

본명은 엽계문(葉繼問, Ip Kai-man),[1] 1893년 10월 1일 청나라 광동성(廣東省) 불산(佛山)[2]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진화순(陳華順)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지만, 당시 진화순의 나이가 70세여서 그의 제자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오중소(吳仲素)로부터 대부분의 기술을 전수받았다. 엽문이 영춘권을 배우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진화순은 병으로 사망하는데, 진화순의 유언 중 하나가 바로 오중소로 하여금 계속해서 엽문에게 영춘권을 가르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엽문은 16세에 친척의 도움을 받아 홍콩으로 이사했고, 1년 뒤 홍콩의 일류 대학인 세인트 스티븐스 대학에 입학했다. 이 시기에 한 영국인 경찰관이 어떤 중국인 여자를 구타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엽문은 그 일에 개입했다. 경찰관이 엽문을 공격하려 했으나 엽문은 경찰관을 쓰러뜨리고 친구와 학교로 도망친다. 이 친구는 같은 아파트에 살던 한 남자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고, 그 남자는 엽문을 만나 어떤 무술을 썼느냐고 묻는다. 남자는 엽문에게 엽문의 자세가 '딱히 좋지 않다'고 말하며 치사오(黐手, 이수)로 그의 영춘권을 테스트해 보겠다고 했다. 엽문은 이를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기회라고 생각했으나 곧 그 남자에게 패배한다. 드라마틱하게도 그 남자는 바로 진화순의 스승 양찬(梁贊)의 큰아들 양벽(梁璧)이었다. 이 사건 이후 엽문은 양벽으로부터 영춘권을 이어 배우기 시작했다곤 하나 양벽과의 만남 스토리 자체가 엽문의 증언뿐 팩트체크를 할 수 없기에[3]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엽문은 24세에 고향 불산으로 돌아와 중국국민당 정부의 경찰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척, 친구, 부하 등 일부에게 영춘권을 가르쳐 주었는데, 당시 무술은 비전에 가까워서 때문에 폐쇄적인 집단 속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전수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시에는 현재와 같이 돈만 내면 무술을 가르쳐주기 시작하는 체육관, 도장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엽문은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국민당 정부의 경찰뿐만 아니라 국민당 내의 극우조직인 남의사에 가입해서 활동했다고 한다. 이 남의사는 장제스에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조직으로, 공산당 및 진보인사에 대한 테러로 악명을 떨쳤었다. 이 부분도 본인만의 주장이라 확인되지는 않는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불산을 점령했고, 엽문은 친일 왕징웨이 정권에게 대자택을 빼았겼다.[4] 이 당시 엽문은 국민당 정부가 있는 충칭에도 가지 않았지만, 왕징웨이 정권에도 부역하지 않고, 민간인으로 제자 양성에만 주력했다.

이어 다시 중화민국이 중일전쟁에서 승리하고 광동성을 수복하자 엽문은 복직한다. 곧 국공내전이 재개되어 경찰조직은 군조직으로 흡수되었고, 엽문도 상교(대령) 신분으로 광저우 방위사령부에 재직하지만, 1949년 광저우도 공산군에 함락되고 곧 모든 대륙에서 국민당 세력은 소탕된다.

3. 홍콩시절

이렇게 국공 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자 (본인주장으로는) 남의사에 가입했던 엽문은 공산당의 보복을 피해 불산을 떠나 홍콩으로 망명했다. 엽문 본인은 홍콩 망명의 이유로 정치적 문제를 들고 있지만, 딱히 장제스나 국민당에 크게 충성심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랬다면 중일전쟁 당시에는 장제스가 천도한 충칭으로 가거나 국부천대 후에는 대만으로 갔어야 하지만, 엽문은 일본 지배하에서는 그저 야인으로 고향에 남았고, 공산 치하에서는 대만이 아니라 홍콩으로 갔기 때문이다. 물론 홍콩과 불산, 즉 포산시는 100km도 안되고, 영토가 넓은 중국기준으로는 서울-인천 정도의 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엽문도 생소한 대만(대만은 당시에는 민남어, 장제스 치하에서는 표준중국어가 쓰였다)보다는 광동어가 통하는 홍콩을 선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공산당으로부터 몸을 피해 가족을 홍콩으로 불러왔으나, 아내와 자식들은 체류증을 얻기 위해 잠시 불산으로 돌려보냈는데, 1951년 중국정부는 본토-홍콩의 월경을 통제하게 되고 대륙인들의 홍콩 망명은 금지되어 더 엽문가족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아내가 1960년 사망한지라, 엽문은 영영 아내를 보지 못한다.[5] 이렇게 아내와 떨어진 이산가족이 되자 엽문은 상하이부인(上海婆)으로 알려진 여자와 동거하게 되고 둘 사이에서 자식 엽소화를 낳았다. 하지만 엽문은 자신의 위신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제자들에게는 상하이부인의 존재를 감추었다고 한다.

한편 엽문은 홍콩에서 도장을 열기는 했으나 제자들은 몇달 수련하고 떠나버리기도 했다. 끝까지 배웠던 제자들 역시 엽문에게 공식 면허를 받아서 도장을 열었고, 홍콩 전역에 영춘권을 보급했다. 엽문과 그 제자들은 홍콩에서 영춘체육회를 조직했다.

엽문이 다른 중국무술 고수들과 다른 점은 무술의 대중화를 추진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무림은 대중화와는 거리가 멀고, 자기 패거리로 간주된 무림 내에서만이 무술의 전수가 이뤄졌지만, 엽문은 홍콩에 오면서 영춘권을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르쳐 준다. 말하자면 중국무술의 프랜차이즈화를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이당시 가장 유명한 제자가 이소룡이다. 1950년대 후반 이소룡은 엽문의 제자 장탁경에 의해 엽문에게 소개되었다. 처음에 엽문은 쿼터 혼혈인 이소룡을 외국인으로 간주하여 영춘권 전수에 소극적이었지만, 장탁경이 강하게 주장하여 이소룡은 엽문 휘하에서 영춘권을 수련하게 되었다. 이소룡은 1959년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엽문 휘하에서 수련하면서 홍콩내의 각종 무술대회에서 우승한다.[6]

1963년 이후 반 은퇴상태가 되었고 도장경영 및 후진양성은 제자들이 맡아서 하게 되었다.

엽문은 홍콩에서는 계속해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불산에 대부분의 재산을 남겨두고 와서 홍콩에서는 재산이 거의 없었던데다, 국민당 시절부터 피워온 아편을 홍콩에 와서도 상습적으로 흡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민당 시절까지 반합법이었던 아편 판매는 공산당이 집권하고 나자 자취를 감추었다. 공산당이 아편을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하여 금지시킨데다가, 아편판매는 사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대륙에서 공급이 줄어들자 아편가격도 치솟았고, 홍콩에서도 가격이 폭등했다. 엽문은 그럼에도 대륙시절 맛들인 아편을 끊지 못하고 버는 돈마다 족족 아편으로 날렸다는 것이다.

아내 장영성이 1960년 자궁암으로 사망하고, 상하이부인까지 68년에 떠나보낸 뒤, 그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72년 12월 2일 인후암으로 사망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 견자단 주연 영화 엽문 시리즈에서는 담배로 순화되었다.[7] 하지만 담배가 더 암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함정이었다. 아편도 파이프 담배 비슷하게 흡입하기 때문에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이 높다. 물론 엽문의 나이로 봐서는 천수를 누린 것에 가깝다.[8]


[1] 중국에서는 중세까지만 해도 성으로 사용할 때는 '섭(반절 書涉切)'으로 읽었고, 이를 따르면 광동어에서는 '엽문'을 '십만'으로 읽게 된다. 다만 지금은 보통화든 광동어든 대부분의 경우 '예/입(한국어로는 엽)'이란 하나의 발음으로 읽도록 바뀐 상황이다. [2] 現 포산시 [3] 다른 유파 영춘권사들은 엽문이 그저 돈에 눈이 멀어 어깨너머로 배운 영춘권으로 사기를 친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는데 견자단 주연의 엽문 3에서 등장한 "장천지"가 바로 저 타파 영춘권사들이 반영된 캐릭터. [4] <일대종사>에서는 엽문이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해서 두 딸이 이때 사망했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살아남았다. [5] 다만 두 아들은 1962년 홍콩으로 망명하여 재회할 수 있었다. [6]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이소룡은 미국에서 중국인들 한에서만 가르치던 무술을 서양인들에게도 가르쳐주었다. 이에 반발한 화교들은 결투를 신청하였고, 당연히 이소룡이 이겼다. 다만 이 결투 때 중국 무술의 실용성에 한계를 느껴서 절권도를 만든 계기가 되었다. [7] <일대종사>에서는 장쯔이가 맡은 엽문의 라이벌 궁아라는 인물이 아편으로 사망한다. [8] 최배달도 흡연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폐암으로 70세에 사망했으니, 엽문은 장수했다고 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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