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與受俱罪法. 조선 4대왕인 세종 대에 처음 논의되고 7대왕인 세조 시기에 잠깐 시행되었던 한국의 고전 뇌물수수방지법. 훗날 9대왕 성종 대에 폐지되었다.2. 내용
2.1. 세종 시기
우리나라는 고려 말기의 문란한 사회상을 거치며 조선 초까지 나쁜 죄질의 뇌물 문화가 만성하고 있었다. 이에 1424년 세종은 삼정승과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불러 뇌물방지를 위한 법 제정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 7월 14일 丁亥 5번째기사, 뇌물을 준 자와 받은 자는 모두 죄주도록 사헌부에 명령를 내리다전조(前朝)의 말년에 뇌물을 공공연하게 왕래하더니, 구습(舊習)이 아직도 남아서 경외(京外)의 관리들이 관가의 물건을 공공연하게 뇌물로 주고도 태연하게 여기면서 조금도 괴이쩍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중에 주는 것을 받으려고 하지 아니하는 자는 도리어 기롱과 조소를 받으니, 이로 말미암아 장죄(贓罪)를 범하는 관리들이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니,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기는 바이다. 법률 조문을 보면, 다만 관가의 소유물을 남에게 준 죄만 있고, 보내 준 것을 받은 죄에 대한 율이 없으므로, 이제 법을 세워, 준 자나 받은 자에게 다 같이 죄를 주고자 하니 특별히 교지를 내려야 할 것인가, 유사(攸司)를 시켜 아뢰게 하여 법을 세울 것인가
1424년 7월 14일 세종대왕
1424년 7월 14일 세종대왕
하지만 영의정 유정현은 “저 같은 늙은이가 먹을 것을 좀 받아먹는 것이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느냐”며 반대 의견을 펼쳤다. 이조판서 허조도 “먹는 것을 주고받는 건 해로울 게 없는데 하필 모든 걸 금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거기다 황희 등의 대형 뇌물사건이 터졌을 때 세종대왕이 그들의 능력을 높이 사 적극적으로 두둔해준 이후로 유명무실해졌다.
2.2. 세조 시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중
사실상 조선조 뇌물수수방지법이 처음 시행된 시기는 세조 대이다. 원래 전조인 고려와 조선은 관리들의 뇌물 수수 활동에 관대한 문화[1]였기 때문에 세종대왕 때도 어느 정도의 뇌물은 왕이 그냥 웃고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세조 대에 뇌물 수수 사건이 터지자 기존의 다른 왕들과는 달리 세조는 과격하게 칼을 빼들기 시작했다.
이 때 세조는 아버지가 주장했던 여수구죄법을 반대의견을 묵살하고 강행하는 한편 수령고소금지법에도 동시에 칼을 빼들었다. #
내가 분대 어사(分臺御史)를 파견하려고 그 행할 만한 일들을 여기에 조열(條列)해 놓았으니, 경들이 보고 행할 수 없는 것은 삭제하되, 되도록 간략하게 하라. 모든 일이 모름지기 간요(簡要)한 연후에야 봉행하여도 폐단이 없는 법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고양이를 기르는 집에는 쥐가 함부로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사(御史)가 비록 일일이 다 적발(摘發)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도내(道內)에 순행하게 되면, 이익을 탐욕하고 잔악한 무리들이 거의 조금은 저지(沮止)될 것이다. 《서경(書經)》 에 이르기를, ‘황제(皇帝)께서 청문(請問)하시니, 아래 백성이 또한 하정(下情)을 상달(上達)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부민(部民)의 고소(告訴)를 금지하는 법을 세운 뒤로부터, 하정이 상달되지 않아서 그 폐단이 작지 않다. 그러나 고소하는 풍조가 행하게 되면, 풍속이 박하고 악해지니 행할 만한 것이 아니다. 내가 어사(御史)로 하여금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물으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1455년 11월 7일 세조 : 도승지에게 분대 어사 파견에 관한 어서를 주다
1455년 11월 7일 세조 : 도승지에게 분대 어사 파견에 관한 어서를 주다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2월 27일 병인 5번째기사 : 경상도 관찰사 등에게 명하여 분대에 고소 당한 수령의 백성 침학을 엄금하다
지난날 대관(臺官)을 분견(分遣)하여 관리의 불법을 규찰하고 또 백성의 원통하고 억울함을 스스로 고소하게 하였는데, 지금 수령(守令)과 품관(品官)·인리(人吏) 들이 자기를 소송한 것을 원망하고 함부로 침학(侵虐)을 행하여 산업을 잃게 할까 염려되니, 경(卿)은 그 금제(禁制)를 엄하게 가(加)하여, 만일에 침학한 자가 있거든 수령 이하는 마땅히 중죄로 논할 것이니 이 뜻을 알라
1456년 2월 27일 세조
1456년 2월 27일 세조
세조실록 5권, 세조 2년 11월 23일 기축 2번째기사 : 팔도 관찰사들에게 백성를 깨우치는 유서를 모든 사람이 알게할 것을 명하다
국왕이 하늘을 몸받아 8도 군민(軍民) 등에게 유시(諭示)한다. 내가 너희들의
부모(父母)가 되어 무릇 무휼(撫恤)하는 방도를 밤낮으로 생각하여 항상 너희들이 관리의 침학(侵虐)에 곤핍(困乏)한 것을 불쌍히 여긴다. 일반 차역(差役)에 있어 부강(富強)한 자는 면방(免放)하고 빈약(貧弱)한 자는 침노하고 독촉하는 것 같은 것, 진상하는 공물(貢物) 및 일반 예(例)에 의하여 과(科)하는 물건을 배수(倍數)나 되게 나누어 배정하고 남는 것을 함부로 쓰는 것 같은 것, 임의로 백성을 모아 영조(營造)하여 폐해를 끼치는 것 같은 것, 죄가 경중(輕重)이 없이 한때의 노함으로 항쇄(項鎖)·수쇄(手鎖)하여 옥에 오래 가두어 혹 생명을 잃는 데에 이르러도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펼 수 없고, 가동(家僮)을 가두되 3일에 한하지 않고 걸핏하면 순월(旬月)을 끌어 산업(産業)을 탕진하는 것 같은 것, 반동(反同) 【혹 어염(魚鹽)·잡물(雜物) 같은 것으로 나누어 계산하여 거두는 것. 혹 포화(布貨)를 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시속(時俗)에서 모두 반동(反同)이라 이른다.】 이라 칭하여 혹독한 아전을 시켜 사방으로 촌락(村落)에 보내어 일체 징수하는 것 같은 것, 상고(商賈)와 연결하여 공물(貢物)을 방납(防納)하고 고가(高價)로 거두어 주는 것 같은 것, 둔전(屯田)을 넓게 점령하여 농민(農民)을 역사시켜 갈고 심어 수확하는 것 같은 것, 장인(匠人)을 가만히 불러 기완(器玩)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가까운 읍(邑)에 증여하는 것 같은 것, 백성들의 재물을 심하게 착취하여 공공연하게 회뢰(賄賂)를 행하는 것 같은 것, 관물(官物)을 제 것같이 보아서 체임(遞任)할 때에 미쳐 남김 없이 써버리고 신관(新官)이 와서 또 백성에게 독촉하여 영판(營辦)하는 것 같은 것, 사객(使客)을 접대하느라고 백성에게 거두어
닭·과실·파·
마늘, 심지어는 바가지·병 등속까지 이르지 않는 것이 없는 것 같은 것, 사객에게 명예를 요구하여 뜻을 아첨하여 굴종(屈從)하여서 민폐(民弊)를 생각하지 않고 명주[紬綿]·비단[段絹]·쌀·콩 같은 것으로 연폐(宴幣)라 칭하여 사사로이 대동한 기생에게 주어 법 아닌 일을 감행하는 것 같은 것, 교활한
아전이 법을 농간하여 침탈(侵奪)을 자행하여도 금제(禁制)하지 못하는 것 같은 것, 이런 등의 일은 모두 너희들이 곤핍(困乏)한 것이다.
이제 이미 영(令)을 내렸으니 공세(貢稅)·상요 사역(常徭事役) 및 임시로 수교(受敎)하여 행문 이첩(行文移牒)한 일 외에 백성을 성가시게 하는 일은 일체 금단(禁斷)한다. 너희들도 또한 이 뜻을 알아서 병사(兵事)와 농사(農事)에 오로지 힘써 부모(父母)를 섬기고 처자(妻子)를 길러 생업(生業)에 안심하라. 적을 막고 군대를 사열하는 일 같은 것은 국가의 중한 일이니, 너희들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각자가 책임을 삼아야 한다. 면하기를 꾀하고 항거(抗拒)하는 자가 있으면 죄가 군정(軍政)에 있다. 너희들은 자세히 알아야 한다. 만일 수령(守令)이 침포(侵暴)하는 일이 있으면 곧장와서 내게 고하라
1456년 11월 23일 세조, 전국 백성에게
이제 이미 영(令)을 내렸으니 공세(貢稅)·상요 사역(常徭事役) 및 임시로 수교(受敎)하여 행문 이첩(行文移牒)한 일 외에 백성을 성가시게 하는 일은 일체 금단(禁斷)한다. 너희들도 또한 이 뜻을 알아서 병사(兵事)와 농사(農事)에 오로지 힘써 부모(父母)를 섬기고 처자(妻子)를 길러 생업(生業)에 안심하라. 적을 막고 군대를 사열하는 일 같은 것은 국가의 중한 일이니, 너희들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각자가 책임을 삼아야 한다. 면하기를 꾀하고 항거(抗拒)하는 자가 있으면 죄가 군정(軍政)에 있다. 너희들은 자세히 알아야 한다. 만일 수령(守令)이 침포(侵暴)하는 일이 있으면 곧장와서 내게 고하라
1456년 11월 23일 세조, 전국 백성에게
이 때 처음으로 뇌물을 수수한 신하에게 사형을 명하고 이후에도 엄벌에 처하도록 했다.
이러한 강압적인 뇌물처벌법은 다다음대 왕인 성종이 즉위한 후 유학자들의 상소를 받아들이면서 폐지되었다.
3. 외부 링크
[1]
불법적인 방법으로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거두어 양반들끼리 뇌물로 주고받더라도 그 경우가 심하지 않다면 그냥 훈훈한 미덕이나 정으로 통했다. 그리고 유교를 전면에 내세웠던 조선의 유생들은 이런 일에 법률을 일일이 만들어가며 처벌하는 것을 무지렁이 백성들에게나 해당되는 행위로써 추하게 보았고, 자신들 양반들이 가진 도덕적 이상 또는 유교적 소양을 통해 스스로 중용함을 미덕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