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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09:28:55

여문환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남송의 명장
呂文煥 | 여문환
이름 여문환(呂文煥)
생몰 ?~?
주군 송이종
송도종
원세조
출신 남송(南宋) 숙주(淑州) 안풍(安豊)
국적 남송(南宋) → 원(元)
사망지 원(元) 숙주(淑州) 안풍(安豊)

呂文煥
생몰연대 미상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제4차 양양 전투에서2.3. 원에 투항하다
3.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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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송 말기의 명장. 양양 공방전의 남송측 총지휘관이었다. 남송이 몽골의 침략을 버틸 수 있는 마지막 힘을 준 인물이었으나 양양 공방전이 계속되고 번성이 함락당하자 중과부적으로 결국 항복했다.

2. 생애

2.1. 초기

남송 숙주 안풍[1] 출신으로, 초기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찍이 군에 입대하여 송 이종 보우(寶祐) 연간에는 여문덕을 따라 귀주 지역을 다스렸고, 개경(開慶), 경정(景定) 연간에는 여문덕을 따라 악주와 사천 등 각지를 전전하며 몽골군과 싸웠다.

1262년 10월, 당시 사천을 지키던 여문덕이 파견에 불응하고 적을 많이 유인하여 공적을 올리지 못한 장교의 이름을 조정에 올렸는데, 여기에는 여문환의 이름이 들어있었고 두 계급이 강등된다. 그리고 여문환은 여문덕을 따라 경호 전선을 지킨다.

2.2. 제4차 양양 전투에서

여문환은 당시 형이었던 여문덕[2][3]과 함께 양양 수비를 맡았다. 이 와중 여문환은 여문덕에게 몽골군이 양양성 공격을 위한 거점을 짓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여문덕의 심복들이 이를 무시했다.

쿠빌라이 칸이 이끄는 남송 원정군이 남송을 침공해오자, 여문환은 형제들과 함께 1267년부터 1273년까지[4] 몽골의 원정대를 상대로 6년 동안 공격을 버텨낸다. 특히 쿠빌라이 칸을 중심으로 침공해온 4차 양양 공방전 당시에도 무려 1년간 방어를 하였고 양양에 원군을 보내려던 남송과 어떻게든 접촉을 하려 하지만 번번히 좌절된다. 그러자 남송 조정에서 고달[5]로 하여금 양양성 방어를 담당하게 하는 것은 어떤지에 대해 논의가 나왔는데, 가사도의 반대로 무산된다.[6]
만약 고달을 기용한다면, 여씨 가문에게 어떻게 인계할 것이오?
이왕(李旺)이 주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씨 가문이 안전하면 조씨 가문은 천하가 위험해지오.
이를 들은 여문환은 고달이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양양 전선에서 승전을 거두고 있다고 허위 보고했다.[7] 공교롭게도 당시 양양 수비군이 몽골 보초기 몇 명을 포로로 잡자 여문환은 송 조정에 대첩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고달로 하여금 양양을 구원하게 하지만 사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가사도 역시 고달을 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게 무려 1년동안 지속된 포위전과 몽골군에서 도입한 새로운 병기인 회회포로 인해 번성과 번성을 잇던 가교가 무너지면서 고립되었고 장병의 사기가 떨어지면서 투항자가 속출한다. 식량은 있었으나 전투 관련 보급 부족, 몽골 측에서 1년동안 버틴 충성심을 이해하니 이제 항복하라는 항복 요구에 부하 장수들에게 설득당한 끝에 결국 항복을 하게 된다.

2.3. 원에 투항하다

이후 여문환은 당연히 쿠빌라이 칸에게 크게 중용되었으며, 여문환의 항복과 양양의 함락으로 인해 결국 남송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원나라가 남송을 공격할 때, 그는 악주[8] 공격을 주도하게 된다. 1274년 2월, 여문환은 형호행성 참지정사(荆湖行省參知政事)로 임명되어 백안 등을 따라 남송을 정벌하여 강주군을 따라 사양, 신성, 악주 등의 성을 함락시킨다. 이후 장강을 지키던 무장들 대부분이 그의 권유로 투항하게 된다.[9]

그러나 신성 수장 변거의가 여문환의 투항을 받은 척하고 성 아래로 유인하여 복노를 맞추는 등 여문환을 사살할 뻔하는 등[10] 애국 충절을 다한 선비들도 많았다.

1275년 5월, 남송의 황태후 사도청(谢道淸)이 여문환(吕文煥) 등에게 조서를 내렸는데, 여문환이 답장 한 통을 보내도 움직이지 않자, 남송 조정에서는 여문환(吕文煥) 등 일가를 전몰하라고 명을 내렸다.

1276년 2월 바얀의 대군이 임안으로 진격하여 남송이 항복하자 여문환이 먼저 입성하여 황방을 들고 군민들을 선유하였고 범문호와 함께 두 궁의 태후를 참배하였다. 이 때 남송 최후의 승상이었던 문천상은 여문환에 대해 역신이라고 비난하였고 여문환은 문천상의 비난에 크게 부끄러워했다.

1276년 5월에는 하귀, 범문호, 진혁 등 다른 항장들과 함께 쿠빌라이를 알현한다.

이후 1277년 중서좌승이 되어 강동을 위무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강서 지역의 차세 징수를 건의하여 원나라의 현지 지배 질서를 공고히 했다.

1279년 애산 전투에서 남송이 완전히 멸망한 이후 그 해 6월 원 세조가 야율희량(耶律希亮)[11]에게 일본 원정의 가부를 물었는데, 그는 진혁, 하귀, 범문호 등 다른 항장들과 함께 원 세조에게 "가벌(可伐)"이라고 하였다.[12]

1286년 정월에는 여문환은 강회행성(江淮行省)의 우승(右丞)으로 재직하던 중 연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할 것을 청하였는데, 원 세조가 허락하여 아들 여사성(吕師聖)을 강동선위사(江東宣慰使)로 삼았다. 그 이후 1298년까지 여문환이 금릉상조암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장사암은 성 바로 북쪽 구석에 대덕 2년 평장 여문환이 지었다.(常照庵,在城正北隅,大德二年平章吕文焕建。)
《지대금릉신지(至大金陵新志)》 권 11
이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3. 평가

혼자 성을 지키다 6년 만에 투항하였으니, 어찌 지나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유일청(刘一清)
여씨 가문은 강주에 있었고, 송나라에서 누차 벼슬을 하였으며, 매우 부유하고, 나라 안팎에서 번영했다. 북군[13]이 도착하여 여문환이 항복하자 연달아 항복하여 아무도 나라를 위해 항거하지 않았다.(틀림없이 여문신[14]은 덕우 초년 전투에서 순국했다.)
유훈[15]
여 장군은 10년이나 양양을 지키고 있사옵니다. 지원병들은 소식이 없고 소리소리마다 가 평장[16]을 죽이라고 욕하는 것을 끊어주십시오.
왕원량(汪元量)

4. 기타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4에서 남송의 장수로 등장. 6년간 원의 공세를 막아냈다는 점에서 전투 78이라는 준수한 능력치를 받았다. 다만, 수성전이 특기였던 사람인데 특기가 기동 + 돌격이라는 게 흠.

여문덕과 여문신[17]을 제외하고, 여문환 본인을 비롯한 여씨 가문의 일원들은, 모두 원에 항복하고 만다.[18]

제4차 양양 전투 와중에도 여문환은 자기 가문의 이득을 중시하여, 고달 등의 원군이 오는 걸 꺼리고 성 내 상황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남송 조정에 유리한 전황이라고 허위 보고했다.

이후《 신원사》가 편찬되었을 때 범문호, 하귀, 유정, 양대연, 주환[19], 진혁 등 남송 항장들과 같은 반열에 놓였다. 또한 신원사에 편찬된 그의 열전의 부록에는 그의 형인 여문덕의 아들 여사기가 수록되어 있다.[20]

송사에는 별도의 열전이 없고 신원사에 있는 여문환의 열전과, 여문환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의 열전 및 다른 역사서들을 교차검증해야 그의 상세한 행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고달, 정붕비, 범문호, 하귀 등 다른 남송 출신의 항장들도 마찬가지이다.


[1] 안후이성 화이난시의 일부이다. [2] 김용 신조협려에서 터무니없이 폄하된 인물중 하나다. 실제 역사상에서는 모국에 충성한 명장이었는데, 소설에서는 주색에 찌들은 소인배로 나온다. [3] 여문환과 여문덕은 종형 종제 관계이다. 종형인 여문덕은 동생 여문복, 여문신이 있었다. [4] 여문덕은 양양 공성전이 벌어지던 중인 1269년에 사망하였다. [5] 고달은 제2차 양양 전투에서 이증백의 수하로 있을 때 양양을 수복한 공이 있었고, 서류관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했으며, 백하 전투에서는 몽골군의 동문위를 격파했고, 제3차 양양 전투에서는 타차르가 이끄는 몽골군을 격파하고 악주 전투에서는 공언휘를 계략으로 주살하는 등 경호 전선에서 명성을 드날렸다. 그러나 가사도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배척당하였다. [6] 고달은 악주 전투 당시 자신의 용맹을 믿고 가사도를 업신여긴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권력을 잡은 가사도에게 배척당하고 말았다. [7] 여문환과 고달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8] 오늘날 호북성 무한시 무창구 [9] 1274년 12월 18일부터 1275년 1월 29일까지 불과 40일 만에 여문환의 권유로 그의 문하생인 구 악주도통 정붕비(程鹏飛), 언강제치사 겸 황주지부 진혁(陳奕), 총관 석국영(石國英), 치주안무사 관경모(蕲州安抚使 官景模), 안동주지부 진암(陳岩), 여문덕의 아들인 병부상서(兵部尙書) 여사기(吕師夔), 강주안무사 전진춘(全眞春), 강주도통(江州都統) 관여덕(管如德), 전지도지휘사 지안경부 범문호, 동생 회서안무부사 여문복도 조정의 흠차를 죽이고 원나라로 귀순했다. [10] 변거의는 성이 무너진 후 불에 타 죽고 말았다. [11] 원나라의 관원으로, 원나라 개국공신 야율초재의 손자이다. [12] 《원사》 야율희량(耶律希亮) 열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13] 원나라의 군대를 의미한다. [14] 여문덕의 아우이다. [15] 1240~1319, 송말원초 시기의 평론가이다. [16] 가사도를 의미한다. [17] 제2차 몽송전쟁 악주 전투에서 전사했던 여문신과 동명이인으로, 1275년 원나라의 군대와 조우해 전사했다. [18] 대표적인 인물로 여문덕의 아들인 여사기, 여문덕의 사위 범문호, 여문덕과 동향인 하귀 등이 있다. 또한 비슷하게도 양대연의 경우 그 형인 양대전이 1242년 사천성 방면에서 몽골군과 싸우다 전사하였지만 양대연 본인과 그의 일족들이 1258년 몽케 칸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19] 삼국시대 손오의 용장 주환과 동명이인이다. [20] 신원사 권 177 열전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