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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1 12:19:08

에이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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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에이원(말).jpg
경마 잡지 '굽소리'에 실린 에이원의 상상화.
에이원의 실물 사진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름 에이원
A ONE
출생 1965년
죽음 1974년 6월 8일(9세)
마번 없음
성별 암컷
털색 밤색
아비 알 수 없음
어미 알 수 없음
성적 공식:50전 46승
비공식:90전 72승[1]

1. 개요2. 생애
2.1. 연승 행진2.2. 죽음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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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경주마. 70년대 초중반 동시대의 경주마들을 아득히 뛰어넘은 능력을 선보이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명마이다.

한 해에만 25전 전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비공식 한국 경마 최다 연승마이며,[2] 동시에 뚝섬 수몰에 의한 자료 소실로 관련된 정보가 대부분 사라져버린 비운의 경주마이기도 하다.

2. 생애

에이원은 1969년 6월 4일 한국마사회가 호주에서 도입했던 35두의 경주마 중 한마리였는데, 에이원의 조교를 맡았던 김승길 조교사(金勝吉, 1932-2000)[3]에 의하면 좌측 앞다리의 발굽벽에 'A1' 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기에 이것을 그대로 마명으로 썼다고 한다.

도입된 지 6개월 후 데뷔전을 시작으로 그해 2승을 거두었던 에이원은 1970년부터 점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1971년에 들어서자 마침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꽃피우기 시작한다.

2.1. 연승 행진

경마 에이원人氣(인기)최고┈8천人波(인파)몰려

당시 에이원의 인기를 실감케 하는 1971년 5월 24일자 경향신문의 기사. 에이원이 뛰었던 경주의 배팅총액 350만원 중 340만원이 에이원에게 걸렸다.

우수한 마체의 밸런스와 추입력을 바탕으로 전술하였듯 1971년 25전의 경주를 치르고 전승하며 그해 최다우승마의 자리를 얻었으며, 마사회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스포츠 신문인 일간스포츠에선 1972년에 21연승, 73년에는 18전 15승으로 두 해 모두 최다 우승을 기록하였다는 기사가 쓰였을 정도로 문자 그대로 우승을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십세기, 제네바, 섬광, 나폴레온 등 당대의 강자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에이원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나오는 경주마다 우승하다 보니 사람들의 흥미 저하를 우려한 마사회는 에이원의 연승을 막기 위해 부담 중량을 72kg 까지 늘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른 경주마들보다 100m 뒤에서 뛰게 하는 '부담 거리'까지 적용했으나,[4] 아랑곳하지 않고 연승을 이어가자 결국 하위 등급의 말들이 뛰는 경주에만 편성시켜 경주마 명목만 유지시켰을 정도였으니 당시 에이원의 강함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2.2. 죽음

1974년, 어느새 9세의 고령이 되었음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던 중 그 해 6월 8일에 산통으로 보건소에서 치료를 받다 죽었다. 죽기 직전에 갑자기 고삐를 끌고 나가 자신이 지내던 마방으로 갔는데, 마지막임을 직감한 조교사가 깔짚을 새로 깔아주자 그곳에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후 부검 결과 사인은 소장 부근에 생긴 종양으로 인한 장 협착으로 인한 산통으로 밝혀졌다.

3. 여담

마사회 공식 채널에서 소개된 바 있다. 영상 11:50 부근부터 관련 내용을 볼 수 있다.


[1] 비공식 기록의 경우, 마사회에서 홍보용으로 발행한 경주마 카드에 삽입된 정보를 기반으로 하였다. [2] 공식 기록으로만 따질 경우, 최다 연승마는 17연승의 미스터파크이다. [3] 뚝섬 경마장 시절 이름을 날렸던 기수이자 명조교사로, 1938년 진행된 제 2회 봄 천황상 우승마 '하세 파크'의 기수인 '김자근봉'(1903-1969, 나중에 '김승배'로 개명)의 아들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서울경마공원에서 활약했던 김학수 조교사의 어버지이기도 하다. [4] 다만 혹자는 이 부담 거리에 관한 부분이 기자의 오해로 인한 잘못된 정보라고 주장하기도 하니, 걸러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