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에브르마르 드 테루안(Evremar de Thérouanne : ?년 ~ 1124년)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로 1102년부터 1105 또는 1107년까지 봉직했으며, 그 후 카이사레아(Caesarea)의 대주교로 1108년부터 1123년 이상까지 부임했다.2. 생애
에브르마르는 프랑스의 테루안(Térouanne) 출신의 사제였으며, 노년기에 제1차 십자군과 성지로 갔다. 1102년에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다임베르트 다 피사(Dagoberto da Pisa)가 국왕 보두앵 1세가 지속적으로 제기한 여러 가지 부정행위와 비 기독교적인 범죄에 대한 혐의로, 교황대사인 파리의 추기경 로베르에 의해 면직되었다. 그리고, 차기 총대주교의 후보를 묻는 추기경에게 성지의 주교들은 경건함과 자애로운 평가를 받던 에브르마르를 제안했다. 보두앵 1세는 에브르마르가 다임베르트와는 달리 예루살렘 왕국의 왕권력에 대한 교회의 우위를 주장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기꺼이 그 제안을 동의했다.1104년, 보두앵 1세는 무슬림 주민들이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안전하게 떠날 수 있다고 약속하여 아크레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당시 해군의 제노바 선원들은 그 약속을 무시하고 그들을 살해하고 강탈했다. 보두앵은 격노하여 제노바인들을 단죄하려 했지만 에브르마르는 그들의 사이에서 화해를 중재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왕국의 자파(Jaffa) 정복 원정에 참가하여, 보두앵 1세와 휘하 병사들에게 성 십자가와 함께 출정하게 하여 그들을 고무시켰으며, 원정에 도움이 되도록 스스로 100명하고도 50명의 병력을 모집했다.
같은 해에 다임베르트는 로마에 가서 그의 혐의에 대하여 항소했으며 교황 파스칼 2세는 그를 복권시켰다. 에브르마르는 이 소식에 대해 들었을 때, 로마로 이동하여 다임베르트를 찾았으나 그는 시칠리아에서 병사했었다. 그 후 파스칼 2세는 에브르마르를 다시 임명하려는 듯했지만 보두앵 1세는 그가 비효율적이며 무능력함 점을 고려하며 불만을 드러냈다. 보두앵 1세는 1099년 다임베르트에게 밀려났던 아르눌 드 쇼크를 에브르마르의 대항마로 로마로 보냈다. 고심하던 파스칼 2세는 결국 아를의 대주교 기벨린 드 사브란(Gibelin de Sabran)을 교황 대사로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이 문제를 결정하도록 전권을 위임했다. 기벨린은 에브르마르가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직책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그 직책을 바칸데(vacante), 공석을 선언한다. 곧바로 보두앵은 기벨린을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제안했으며, 기벨린은 자리를 승낙한 후 에브르마르에게는 카이사레아(Caesarea)의 대주교 자리를 보상으로 받았다.
1119년 그는 다시 성 십자가와 함께 전장으로 나아가는 군대를 축복했다. 그는 1120년 나블루스 공의회에서 확정한 계율의 서명자였으며, 1123년에는 예루살렘 왕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간의 무역협정이자 동맹조약인 Pactum Warmundi의 서명자였다. 에브르마르의 사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현대의 역사서이자 저명한 가톨릭 백과사전(Catholic Encyclopedia)은 에브르마르가 교황의 비준을 받지 않아 반 총대주교(anti-patriarch)로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