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빈 발라비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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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19대 |
이름 |
에르빈 발라비오 (Erwin Ballabio) |
생년월일 | 1918년 10월 20일 |
사망년월일 | 2008년 3월 4일 (향년 89세) |
국적 | 스위스 |
출신지 | 베틀라흐 |
포지션 | 골키퍼 |
신체조건 | 177cm | 80kg |
소속팀 |
FC 그렌첸 (1934-1956) → FC 로잔 스포르 (1940-1941 / 임대) → FC 툰 (1946-1948 / 임대) |
국가대표 | 27경기 (1939-1947) |
감독 |
FC 그렌첸 (1956-1966) 스위스 대표팀 (1967-1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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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위스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원래 발라비오는 FC 그렌첸 유스팀의 수비수였지만 1933년, 팀이 0대7로 대패하자 감독이 발라비오를 골키퍼 포지션에 넣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발라비오가 페널티 킥을 막아내자 감독은 그의 포지션을 골키퍼로 고정시켰다.16살이던 1934년에 발라비오는 1군 무대에 데뷔했고 직업 훈련 때문에 FC 로잔 스포르와 FC 툰에 있던 3시즌을 제외하면 1956년까지 그렌첸의 골문을 지켰다.
1956년 젊은 선수들에 기회를 주기 위해 은퇴하고 팀의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1959년 스위스 컵 결승전에서 골키퍼 캄폴레오니가 부상을 입자 발라비오가 다시 골키퍼 장갑을 꼈고 그렌첸의 1대0 승리를 지켰다.
2.1.2. 국가대표
발라비오는 1938년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빌리 후버의 후보 골키퍼였고 선발 출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발라비오의 나티 데뷔전은 1939년 2월의 포르투갈전이었고 스위스는 4대2로 승리를 챙겼다.
그는 1947년까지 27경기에 나섰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A매치 출전에 손해를 많이 보았다.
2.2. 감독
FC 그렌첸은 발라비오가 감독을 맡을 때 강등당했지만 그는 팀을 나치오날리가 A로 다시 올려놓았다. 발라비오는 그렌첸의 감독으로 10시즌을 재직하면서 1959년의 나치오날리가 A 준우승과 스위스 컵 우승의 업적을 이뤘다. 이는 지금까지도 그렌첸의 최고 성적이다.1967년, 알프레도 포니의 뒤를 이어 스위스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5월 24일, 대표팀 감독 데뷔전에서 발라비오의 대표팀은 루마니아에 7대1 대승을 거둬 산뜻하게 출발했지만 이후 16경기에서 4승 4무 8패의 부진한 성적을 냈다. 이로 인해 발라비오는 경질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민첩성과 반사 신경이 탁월해 흑표범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골키퍼. 위치 선정도 좋았고 상대 공격수와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함도 갖췄다.4. 뒷이야기
- 발라비오가 선수 시절에 받은 직업 교육은 큰 효과를 발휘했는데 1953년에 그는 사업 수완으로 그렌첸에서 가장 큰 영화관을 인수할 수 있었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2. 감독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